최고참 ‘김현수’ 개인택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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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참 ‘김현수’ 개인택시 기사
  • 김슬기 기자
  • 승인 2015.08.11 16: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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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셋 청춘에 시작한 택시운전 ‘한우물’

▲청춘, 그리고 중년을 지나 이제는 할아버지 소리를 듣지만 그의 곁엔 언제나 택시가 있었다. 영업이 끝나고 집 앞에 세워놓은 택시에 다시 올라탄 김현수 기사. 쑥스러운듯 미소짓는 그에게 노을빛이 비친다.

“우리 집에는 매일 나 홀로 있었지, 아버지는 택시드라이버(운전기사), 어디냐고 여쭤보면 항상 양화대교…(생략)”
요즘 카페, 음식점에 들어가면 심심치 않게 듣게 되는 노래, 가수 자이언티의 ‘양화대교’다. 택시운전을 하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낸 노랫말에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데 이번 주 ‘열창이 만난 사람’ 주인공도 택시기사님. 47년 동안 군민들의 발이 되어 소소한 삶을 실어 나른 읍내 최고 경력 택시기사 김현수(70ㆍ순창읍 양지길) 씨를 만났다.

청춘을 바친 택시운전

스물세 살 어린 나이에 택시 운전을 시작했다는 김현수 씨는 그동안 한눈팔지 않고 택시만 운전해온 뚝심 있는 베테랑 기사다. 처음 3년은 군대에서, 그 뒤로 순창에서만 택시 운전을 했고 개인택시는 82년도부터 시작했다고. 그는 “그때는 택시운전이 돈을 잘 버는 직업이었어요. 택시 사업이 잘되니까 경쟁이 치열했었지. 군에서 기사를 뽑는데 무사고 경력으로 선발돼서 정부에서 개인택시를 무상으로 받아가지고 일을 했어요”라고 말했다.
일찍 결혼해 어린 나이임에도 가장으로서 집안 살림을 책임져야 했던 그는 남들 다 하는 술도, 담배도 배우지 않았다. 운전을 하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고. 그는 “결혼을 일찍 했다. 나는 스물 셋, 아내는 스무 살이었다. 2남 2녀를 이 택시로 다 가르쳤다. 큰 딸만 고등학교 가르치고 나머지는 다 4년제 대학교 보냈다. 지금 큰 아들은 전북대 교수고 큰 며느리는 선생님이다. 막내아들 며느리는 군청 공무원으로 있다”면서 “그때만 해도 담뱃값을 무시 못해 ‘일주일이면 담뱃값만 얼마다’하는 생각이 들어서 아예 처음부터 배우지 않았다. 뭐든 아끼려고 노력했고 일도 남들보다 더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말로만 열심히 한 것이 아닌 것은 당시 5년이 되면 의무적으로 폐차를 해야 했는데 김 씨가 운전하는 택시는 4년 반 정도면 바꿔야 할 정도였다.

포니부터 소나타까지

개인택시를 시작한 82년부터 김현수 씨의 애마(?)는 총 7대. 포니부터 소나타까지 모두 현대차다. 왜 그는 현대차만 고집할까. 김 씨는 “현대차가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타는 건 아니다. 고장이 나면 바로 고쳐 영업을 해야 하고 바로바로 움직여야 하는데 현대차는 부속이 흔하고 어디든지 가면 살 수 있고 고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처음에 포니부터 스텔라, 또 한 번 스텔라, 그리고 소타나 쓰리, 다음이 뉴이에프 소나타, 와이에프 소나타, 지금 엔에프 소나타까지 총 7대”라며 자동화 시스템을 자랑하는 일곱 번째 택시를 자랑했다.
긴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손님들을 태웠을지 짐작이 안 되는 그에게도 잊고 싶은 기억, 뿌듯했던 순간을 선물한 손님은 또렷하게 기억된다. 그는 “순창에 산부인과가 없어서 광주까지 산모를 태우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은 병원까지 태워다 주고 돌아오는데 상황이 급박해서 택시 안에서 애기를 낳을 때도 있었다. 나도 젊을 때여서 당황하고 놀랐던 기억이 있지만 뿌듯했던 순간이었다. 반대로 정말 일 하기 싫을 때도 있는데 술을 마시고 만취상태로 이리 갑시다, 저리 갑시다, 하는 손님들을 태웠을 때다. 가끔 정말 곤란할 때가 있었다”며 별 탈 없이 무난한 곡선을 그려왔던 인생이지만 그래도 기억나는 순간들에 대해 곱씹어보았다.

앞으로 5년, 그 이상도

택시 운전을 하며 친절, 그리고 폭리를 취하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일해 온 김현수 씨. 그는 “고객 관리를 잘 못하고 요금도 비싸게 받으면 누가 택시를 타겠나. 요즘은 미터기가 있어서 정확하게 돈 계산이 되지만 예전엔 그러지 않았다. 비지떡도 싸야 사먹는다고 시골 어르신들 모시고 다니며 요금을 싸게 받았었다. 지금은 그렇게 인연을 맺은 단골들이 연세가 드셔서 돌아가시고 안 계시지만 지금도 전화주시는 분들이 있기에 운전대를 놓지 않는다. 오늘도 아이들이 집에 와서 놀러 가자고 하는 걸 손님이 계속 전화를 하셔서 이따가 가자고 했다”면서 “앞으로 5년 후를 은퇴시기로 점찍어 놓았지만 그렇게 되려나 모르겠다. 암만해도 누가 부르면 가지 않겠나. 마음은 ‘그때까지만 해야지’ 하고, 아이들도 이제 그만 쉬라고 하지만 사람 욕심이란 게 그게 쉽게 되지 않을 것 같다. 5년 후가 지나봐야 알 것”이라며 웃어보였다.
푸른 느티나무 아래 은빛 택시는 오늘도 고객의 전화 한통에 ‘사람’을 싣고, 한 해 농사의 ‘결실’을 싣고, ‘꿈’을 싣고 달린다. “지금은 차가 많아져서 택시 사업이 잘 안 된다. 나는 이제 나이가 먹어서 편하게 ‘콜’만 뛰지만 젊은 후배들이 걱정이다. 터미널 정류장에 가서 보면 뙤약볕에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 안타깝고 속상하다. 우리 후배들이 돈 많이 벌고 잘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한 김현수 기사. 그의 바람처럼 오늘 아침, 택시기사님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반짝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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