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 고려인(2-1) 민족의 아픔이자 자부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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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 고려인(2-1) 민족의 아픔이자 자부심이었다
  • 조남훈 기자
  • 승인 2016.03.30 15: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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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면서도 한국인이 되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다. 100여년 전, 그들은 조선인으로 불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뜻과 상관없이 낯선 땅에 정착했고 반세기가 지나도록 모국을 밟지 못했다. 한참이 지난 뒤 모국 방문이 가능해졌을 때 그들은 모국을 밟을 수 없었다. 대신 그 자녀들 일부가 왔다. 살 곳을 찾아 연해주로 갔다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된 사람들, <열린순창>은 2주에 걸쳐 고려인과 그 후손의 이야기를 싣는다.                                            
<편집자>

▲강제이주 된 고려인들은 근면함으로 고난을 이겨냈다. ‘콜호즈의 영웅’ 김병화 씨는 고려인 사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두 번이나 소련 노력영웅훈장을 받았고 그가 농장장으로 있던 북극성 농장에서는 24명이 노력영웅훈장을 받았다.

 

박해 피하고 살 곳 찾아 연해주 갔다가 ‘강제이주’
민족동질성ㆍ이질성 모두 유지하려 ‘고려인’ 칭호

한국에서 사람들이 고려인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은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소련)과 수교를 맺은 1990년 이후부터다. 그 이전에는 고려인의 존재는 들어는 봤지만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 
고려인의 기원은 19세기 중반 먹고 살기 힘든 농민들이 살 곳을 찾아 연해주로 이주한 것이 그 시작이다. 이후 두만강을 건너는 농민들이 많아져 한 때 러시아 극동지방의 조선인이 러시아인보다 많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1897년 러시아 제국이 처음으로 진행했던 인구조사결과 극동지방에서는 2만6005명이 한국어를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중국어를 쓰는 사람의 절반 수준이며 일본어 사용자보다는 10배나 많은 숫자다. 5년 뒤인 1902년에는 그 수가 3만2000명 이상으로 늘어났고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는 무려 17만명을 육박했다. 다소 정확도가 떨어지더라도 호구통계를 바탕으로 추정하는 당시 조선 인구가 1700만명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매우 많은 수임을 알 수 있다.
연해주로 간 조선인들은 그곳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듯 보였지만 러일전쟁의 영향으로 한 차례 흩어지게 된다. 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극동지방에서 득세하면서 조선인들은 시베리아와 만주 등으로 흩어지게 됐다. 지금의 조선족은 당시 만주로 이주한 사람들과 일제강점기 당시 옮겨간 사람들의 후손이다. 연해주와 만주로 간 사람들은 탄압에 저항하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했고 실제 전투를 벌여 일본군을 물리치기도 했다. 자치활동을 일부 보장하는 등 조선인에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러시아의 조선인 이주정책은 1925년을 기점으로 달라진다. 러시아는 1930년부터 비록 적은 숫자지만 석연치 않은 정치적 이유로 조선인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조선인 강제이주는 1937년 8월부터 10월까지 약 두 달 동안 집중됐다. 당시 소련은 구소련 인민 위원회와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중앙 위원회의 공동 법령에 근거해 17만명에 달하는 러시아 극동 지방의 조선인들을 강제이주시켰다. 명목은 일본 첩자의 침투를 막는다는 것이었다. 강제이주된 사람들 가운데는 독립군 장군이었던 홍범도도 있었다.
이주한 조선인들이 고려인이 된 것은 그 후의 일이다. 국호를 두고 남에서는 한국(대한민국)이라고 부르는 반면 북에서는 조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불렀다. 모국과 단절된 삶을 살았을지언정 그들은 민족동질성과 이질성을 모두 유지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들은 한국인과 조선인 대신 영문 국호였던 코리아의 어원을 따서 스스로 ‘고려인’이라고 하는 기발한 단어를 만들어냈다. 고려인이라는 단어는 1988년부터 공식적으로 쓰였고 1993년 5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소련 조선인 대표자 회의에서 정식으로 채택됐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실린 고려인들은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이주됐다. 핍박을 피해 연해주에 정착했다가 또 다시 핍박을 받은 고려인들은 황량한 땅에서 어떻게든 살아가야 했다. 이주 초기에는 영양결핍과 환경 부적응으로 인한 질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남은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농사였다.

▲황량한 땅에서 어떻게든 살아가야 했던 고려인들의 목화 재배 모습.

고려인들은 살기 위해 농토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벼와 목화, 배추 등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며 농지를 일궜다. 관개수로를 만들고 날씨와 지형에 맞는 작물을 찾아 재배하는 등 생산성을 높이고자 노력했던 근면함은 소련 정부에서도 인정받았다. 209명의 고려인이 소련 노동영웅 훈장을 받았고 우즈베키스탄에서 노력훈장을 받은 650명 가운데 139명이 고려인이었다.
고려인들은 그곳에서도 자신들의 생활양식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결혼도 고려인끼리 하고 자녀를 키웠다. 그곳에서 태어난 자녀들도 부모의 근면함을 보고 자라며 열심히 일했다. 군내 정착한 고려인 3세 출신 주민에 의하면 고려인 2세부터는 소득수준이 현지인보다 월등히 높고 대학을 다니고 사회 지도자가 된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런데 고려인들은 수십 년 동안 고국에 갈 수 없었다. 교류가 거의 없었던 탓에 노력해도 갈 수 없는 환경이었고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도 없었다. 시간이 흘러 외교가 활발해지고 그들이 고국에 방문할 수 있게 된 때에는 많은 가족들이 이미 죽거나 이사가 만날 수 없었다. 그들은 고향땅에서 살기를 포기했다. 1세대가 와서 살기에 그들은 너무 늙었고 2세대에게 한국은 부모에게 얘기를 들었어도 낯선 땅이고 부빌 언덕이 없었다. 고려인은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슬픈 역사이고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이면서 동시에 뿌리를 잃지 않은 자부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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