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동’ 선생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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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동’ 선생 별세
  • 림양호 편집인
  • 승인 2016.08.11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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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과면 출신, 순창농림학교 1회 졸업
도내 생존 애국지사 이석규 옹 한 분

 

애국지사 이희동(李熙東ㆍ사진) 선생이 지난 8일 오전 10시 35분 별세했다. 향년 91세.
일제강점시기인 1925년 3월 20일 순창읍에서 출생한 이희동 애국지사는 1942년 4월 순창농림학교에 입학해서 박내은 교사의 반일민족교육에 감화를 받던 중 박내은 교사가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는 혐의로 일경에 피체되자, 1944년 순창농림학교 3학년때 민병호(閔丙浩ㆍ정동영 국회의원 장인)ㆍ홍석길(洪錫吉)ㆍ양태철(梁態喆)ㆍ이병기(李秉起)ㆍ진강욱(晉岡旭)ㆍ노필식(盧必熄)ㆍ서선표(徐先杓)ㆍ서규선(徐圭善)ㆍ홍상근(洪相根)ㆍ신영식(申永植)ㆍ신병식(申丙植)ㆍ정영조(鄭永祚)ㆍ김용철(金容哲) 등 14명이 화녕회(和寧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화녕회는 독서회 등을 통해 민족정신 고취와 독립의 쟁취를 목적으로 하였고, 이를 위하여 해외의 독립투사들과 연락을 취하여 일제를 타도하고자 한 항일단체였다. 이희동 애국지사를 비롯한 화녕 회원들은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본격적인 항일투쟁에 나서기로 결의하고 반일낙서 및 공출 방해운동 등을 전개했다.
1945년 1월경, 황해도 해주 일인 상점에 위장 취업했던 화녕회원인 홍석길이 보낸 일어로 된 “일본패전이 가까워졌으며, 우리의 구조선이 곧 도착할 것이니 동지여! 분발하라”라는 격문이 순창우편국에서 발견되어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순창농림학교 학적부에 의하면 선생은 1945. 3. 31 사상관계로 퇴학 당해 전주형무소에 미결로 수감돼있다 석방됐다.
해방후 광복회 전북지부 7대와 8대 지부장 및 순창농림학교 총동문회 3대 회장 등을 역임했다. 정부는 지사의 공훈에 대해 1986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유족으로 아들 교건, 교찬, 교춘, 교득 씨와 딸 순희 씨가 있다. 큰아들 교건(68) 씨는 “아버지는 나라 사랑의 마음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고 사신 강직한 분이셨다. 아버님께서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매우 크셨다”면서 “아버님의 뜻을 받들어 저희도 열심히 나라 사랑의 길을 갈 터이니 이제 마음 놓으시고 편히 가셨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빈소는 전북대학병원 장례식장, 지난 10일 오전 8시 발인해서 국립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묻혔다.
한편, 광복 71주년을 맞는 올해, 광복절을 일주일 앞두고 이 옹이 별세함에 따라 도내 생존 애국지사는 완주에서 거주 중인 이석규(90) 애국지사, 한 분만 남게 됐다. 광복회 전북지부에 따르면 도내 619명의 애국지사 가운데 한 분만 생존한 것. 이석규(89) 애국지사는 익산 출생으로 1943년 10월에 18명의 학우들과 ‘무등독서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44년 10월 경 일본 경찰에 발각돼 ‘비밀결사독립운동죄’로 수감돼 모진 고문 속에 옥고를 치르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죽음 직전에 출옥한 뒤,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표창이 서훈됐다.
정리 : 림양호 기자
사진 : 광복회 제공

▲순창농림학교 개교당시 모습.

 

●순창농림학교 항일구국단체  ‘화녕회’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5월경 순창농림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희동 등 재학생 14명이 비밀결사단체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갈 것을 결의하였다. 결사단체의 이름을 조선 건국자 이성계의 출생지 ‘화녕’으로 하여, 조선의 정신을 계승하여 독립을 쟁취한다는 의미에서 ‘화녕회(和寧會)’로 정하였다. 결사 목적은 ①독립정신 고취 ②독립 쟁취에 관한 연구 ③기회를 포착하여 항일투쟁 전개 ④해외 망명 독립운동가와의 접선 ⑤일제 타도ㆍ독립 쟁취 등에 두었다.

당시 화녕회는 일제의 감찰을 피하기 위하여 본 이름을 숨기고 독서회라는 이름으로 활약하였는데 그 조직은 다음과 같다.
화녕회원은 먼저 <고사통(古史通)>과 같은 국사 서적을 비롯해 <흙>, <왕자호동>, <단종애사>와 같은 역사 소설을 읽고 독후감을 발표하는 모임 등을 통해 우리말과 역사문화전통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하고, 일제 침략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길러 나갔다. 당시 일제는 조선 학생이 조선 역사나 역사소설 등을 탐독하고 있으면 이를 사상이 불온하다 하여 체포 구속하였으므로, 천장 속에 서적을 숨겨놓고 밤에 몰래 서적을 주고받는 등 비밀리에 독서회를 끌어갔다.
독서회는 비밀 장소에서 가졌으며, 아울러 회합이 있을 때마다 중국에서 광복군이 일본 침략군과 분전하는 상황, 백범 김구선생이 중심이 된 중경 임시정부의 활동상황,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한 미국에서의 독립운동 상황 등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여 회원들의 사기를 높이고 향후의 행동방침 등을 논의하였다. 이런 모임 외에도 순창면 순화리의 민병호 하숙집, 순창면 남계리의 은행교 밑 등에서 비밀리에 회합을 가졌으며, 이를 통해 한층 더 항일 의식과 독립운동정신을 굳건히 하였다.
1943년 9월에는 홍석길 회원이 상해 만주 등지에서 활약하는 독립지사들과 연락을 목적으로, 가정 형편을 핑계 삼아 학교를 자퇴한 후 황해도 해주로 가서 일본인 상점에 점원으로 위장 취업을 하였다.
1944년 태평양전쟁이 종반에 접어들어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다음과 같이 운동 목표를 정하고 이를 맹서하였다. ①농촌에 침투하여 일제의 강제 징병ㆍ징용ㆍ정신대를 기피하도록 적극 선동한다.
②식량 공출을 거부하도록 선동한다. ③일제의 군용기 제작 헌금, 군용 물자 헌납을 반대하도록 선동한다. ④기회를 포착하여 경찰서 주재소(현재의 지서) 등을 폭파 습격하여 독립만세를 부른다. ⑤거사 후에 만주 중국 등으로 탈출 망명, 상해 임시정부 및 광복군에 투신하여 최후까지 일제 타도를 위하여 싸운다.
그리하여 회장 이희동은 동기생들을 선동할 목적으로 교실 흑판에 ‘일제타도’ ‘조선독립만세’등 반일적 ‘낙서사건’으로 문제를 야기하는 등 구체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그런 과정에서 진강욱ㆍ노필환ㆍ민병호가 야밤에 남계리 순창천 언덕길에서 한인 초등학교 여교사와 데이트 중인 일본인 국민학교 남교사를 구타하여 일경의 수사선상에 오르는 일을 겪기도 하였다.
이처럼 활발한 항일운동을 전개하던 화녕회 회원들은 1944년 7월 홍석길 회원이 보낸 편지가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체포 구금되었다. 상해 임시정부와 접선을 위해 해주에 위장 잠입해 있던 홍석길 회원이, 순창에서 거사 후 밀행하여 해주에 집결하라는 내용의 연락문을 이희동 회원에게 우편으로 보내왔는데, 이것이 순창우편국에서 일본 경찰의 우편물 검열로 발각되었던 것이다.
1차로 해주에 가 있는 홍석길 회원과 이희동 회원이 검거되었으며, 조사과정에서 전모가 탄로나 전원 검거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구속 후 잔인한 물고문, 비행기고문(공중에 달아 메는 고문), 매고문, 잠 안 재우기 등 갖은 고문을 당하였다. 고문 경찰 가운데는 한국인 고등계 형사도 끼어 있어 안타까움을 더했다. 당시 이 사건에 연루되어 홍일우(洪一宇)ㆍ서선표(徐先杓)ㆍ신영식(申永植)ㆍ최일원(崔一源)ㆍ홍성해(洪性海) 등도 구속되었다.
화녕회 회원들은 순창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은 후 전라북도 경찰부에 압송되어 재조사를 받았으며, 일본 헌병 전주분견대에 압송되어 또 한 차례 혹독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약 5개월간 조사과정을 거쳐 1945년 1월에 일본 검찰에 기소되었으며, 전주형무소 미결수 감방에서 공판을 기다리던 중 8ㆍ15 광복으로 영어의 질곡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일제의 간담을 써늘하게 했던 순창농림학교 학생들의 구국운동이며 조선 학생 항일운동사에 영원히 기억될 사건이다.
자료 원문 : 순창제일 55년사 (1997ㆍ순창중 제일고 동문회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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