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정의를 무엇이라 말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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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정의를 무엇이라 말하겠는가!
  • 안기환 독자
  • 승인 2016.12.14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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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환(순창읍 경천1로)
정의(JUSTICE)를 무엇이라 말하겠는가!

당신은 전차기관사이고, 시속 100킬로미터로 철로를 질주하고 있는데 저 앞에 인부 다섯 명이 작업도구를 들고 철로에 서 있다고 가정해보자. 전차를 멈추려 했지만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이 속도로 질주하여 들이 받는다면 인부들이 모두 죽고 만다는 사실을 알기에 절박한 심정이 된다. 이때 오른쪽에 있는 비상 철로가 눈에 들어오는데 그 곳에도 인부가 있지만 한 명이다. 전차를 비상철로로 돌리면 인부 한 사람이 죽는 대신 다섯 사람이 살 수 있는데, 이때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돌려! 죄 없는 사람하나가 죽겠지만, 다섯이 죽는 것보다는 낫잖아’ 한 사람을 희생해 다섯 목숨을 구하는 행위는 정당해 보인다. 과연 우리는 이것을 정의라 자신 있게 말을 할 수가 있을까?
다른 전차 이야기를 해보자. 당신은 기관사가 아니라, 철로를 바라보며 다리위에 서 있는 구경꾼이다. 저 아래 철로로 전차가 들어오고, 철로 끝에 인부 다섯 명이 있으나 이번에도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아 전차가 인부 다섯 명을 들이받기 직전이다. 피할 수 없는 재앙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다가 문득 당신 옆에 서 있는 덩치가 산만한 남자를 발견한다. 당신은 그 사람을 밀어 전차가 들어오는 철로로 떨어뜨릴 수 있다. 그러면 남자는 죽겠지만 인부 다섯 명은 목숨을 건질 것이다. 그렇다면 덩치 큰 남자를 철로로 미는 행위가 과연 옳은 일인가?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연히 옳지 않지, 그 남자를 철로로 미는 것은 아주 몹쓸 짓이야’ 누군가를 다리 아래로 밀어 죽게 하는 행위는 비록 죄 없는 다섯 사람의 목숨을 구한다 해도 끔찍한 짓 같다.
여기서 애매한 도덕적 문제가 생긴다. 한 사람을 희생해 다섯 사람을 구하는 첫 번째 예에서는 옳은 것 같던 원칙이 왜 두 번째 예에서는 그렇지 않을까?
첫 번째 예에서는 우리 반응이 보여주듯이 숫자가 중요하다면, 그러니까 한 사람을 구하기보다 다섯 사람을 구하는 편이 낫다면, 왜 이 원칙을 두 번째 예에 적용해 남자를 밀면 안 되는가? 사람을 밀어서 죽게 하는 행위는 아무리 바람직한 이유를 내세워도 잔인해 보인다. 그렇다면 사람을 전차에 치여 죽게 하는 행위는 덜 잔인한가?
사람을 미는 행위가 잘못인 이유는 다리에 서 있는 남자의 의지를 거스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남자는 어쨌거나 직접 나설 뜻을 보이지 않았고 거기에 서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건 비상 철로에서 일하던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도 직접 나설 뜻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맡은 일을 하고 있었을 뿐이지, 달려오는 전차에 목숨을 던지려 하지는 않았다. 철로에서 일하는 사람은 옆에 구경이나 하는 사람과 달리 위험을 각오한 사람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상시에는 목숨을 버려 다른 사람을 구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조항은 애초 업무일지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철로 인부라고 해서 다리 위의 구경꾼보다 자기 목숨을 희생할 의사가 더 많지 않다고 가정해보자.
어쩌면 도덕적 차이는 두 경우 모두 죽음으로 끝나는 희생의 결과에 있지 않고, 결정을 내리는 사람의 의도에 있을지 모른다. 당신이 전차 기관사라면, 진로를 바꾼 자신의 선택을 변호하면서, 비상철로에 있던 인부를 죽일 ‘의도’가 없었다고 말할 것이다. 비록 죽음을 예상했지만… 만약 엄청난 행운이 따라서, 인부 다섯 명이 목숨을 건지고 여섯 번째 인부도 가까스로 살아났다 해도 당신은 여전히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사람을 미는 경우도 똑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다리에 있던 사람을 밀어 죽게 하는 것이 원래의 목적은 아니다. 그 남자가 해야 할 일은 전차를 막는 것이다. 만약 그가 전차를 막고도 살아났다면 당신은 기뻐할 것이다.
우리는 인부 다섯 명이 자기에게 주어진 책무를 게을리 하지 아니하여 전차가 오는 것을 미리 발견하고 피했다면, 기관사는 인부 다섯 명을 살리기 위해 본인의 임무에 충실한 한 사람을 억울한 죽음의 길로 몰아넣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선호한다.
그러나 현실은 항상 냉정하고 잔혹하다. 그래서 인부 한 사람은 무엇 때문에 자기가 다섯 명의 인부를 위해 죽어야 하는지 모른 체 죽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동안 누구 때문에 풍요로운 삶을 영위했으며, 혹 비루한 충성자는 아니었는지 되돌아보고, 좌고우면(左顧右眄)한 후 국민들의 ‘촛불이 모여’ 무엇을 요구하는지, 정의가 무엇인지? 고뇌해야 한다. 이번 기회에 우리 군도 정의가 무엇인가를 고찰하여 변곡점이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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