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론순창] 동계면 신흥리 ‘합미성’과 ‘오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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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론순창] 동계면 신흥리 ‘합미성’과 ‘오수천’
  • 김상진 기자
  • 승인 2020.04.23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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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미성 서쪽 성벽은 약 3미터 가량 남아있다.

백제시대 ‘포곡식’ 석성
…오수천 확보ㆍ감시 ‘역할’

합미성(合米城,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71호)은 동계면 신흥리에 있다. 신흥리는 합미성 앞에 있어서 ‘재앞’이라고도 불렸다. 
합미성, 할미성, 합민성은 고성(古城)을 지칭하는 것으로 진안군 마령면의 합미산성과 남원시 인월면 합민성, 이백면 할미성 등과 같이 주로 삼국 시대에 축조된 산성이다. 동계 합미성 또한 백제시대에 축조된 성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성을 보수하여 군량미를 저장하였기 때문에 합미성이라고 불렸다고 전해지고 있어 조선시대에 개축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합미성 남서쪽 1킬로미터 지점에는 해발 360미터의 자라봉이 있고, 동쪽과 남쪽 2킬로미터 지점에는 오수천이 흐르고 있다. 산성 주변 지형은 해발 300~600미터 산과 그 사이에 작은 분지형 평야가 발달해있어 사방으로 도로가 펼쳐진 곳이다. 합미성은 남쪽에서 오수천 유역을 따라 오르는 통로를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추측된다.
합미성에 가기 위해서는 장동삼거리에서 장동마을 방향으로 600미터 가량 가면 밤나무 단지가 있다. 이곳에 합미성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북쪽으로 골짜기를 따라 250미터를 오르면 산 정상부에 이른다. 두 봉우리 사이 계곡을 막아 축조한 남쪽 성벽을 볼 수 있다.
합미성 동서 길이는 196미터, 남북 너비는 약 75미터며 전체 둘레는 약 484미터다. 
합미성은 포곡식(산봉우리를 중심으로 주변 계곡 일대를 돌아가며 벽을 쌓는 방식) 석성으로 장타원형의 형태를 띠고 있다. 남쪽 성벽 안쪽에는 대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수구(水口)가 확인되고 있다. 북벽은 능선을 통과하고 있는데 성벽이 대부분 무너져 있다. 3미터 높이 서벽이 남아있고, 성벽 상단에는 너비 3미터 회랑(사원, 궁전에서 주요 부분을 둘러싼 지붕이 있는 긴 복도)이 있다. 성미성은 서문터, 동문터, 북문터가 있고, 내성과 외성 사이에도 성문이 남아 있다. 
고대에는 수로가 지금의 고속도로처럼 중요한 교통 기능을 했다. 합미성은 오수천을 확보하려고 오수천을 감시하고 더 나아가 영역의 안전과 확장 기반이 되는 구실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수천에 얽힌 설화

오수견…주인 지키려 몸 던진 의견
고려 때 김개인이라는 사람이 술에 취해 길가에서 자는데 들불이 일어났다. 함께 있던 개는 불길이 거세지자 주인을 지키기 위해 냇물에 몸을 적셔 주인에게 가까워지는 불길에 몸을 던졌으나 뜨거워진 불길을 잡지 못하고 결국 김개인과 개는 함께 세상을 뜨고 말았다.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개무덤을 만들어 지팡이를 꽂았는데 그 나무가 살아나고 이를 ‘오수’라고 칭했다.  

구송정…태평성대 부르는 아홉 노인
조선 숙종 때 ‘양ㆍ김ㆍ하ㆍ정ㆍ황ㆍ 최ㆍ박ㆍ이ㆍ설’ 씨의 성을 가진 노인 아홉 명이 오수천 서호도에서 풍류를 즐겼다. 김 씨는 서예에 능하고 하 씨는 좌담이, 정 씨와 황 씨는 시창이, 최ㆍ박ㆍ이 씨는 악기를 잘 다루었다고 한다. 각양각색의 능력을 갖춘 아홉 노인이 뜻을 합쳐 구로회를 만들었다. 아홉 노인은 각각 한 그루의 소나무 뿌리를 추렴해 식수했다. 이 소나무는 한그루도 희생되지 않고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고 전해진다.         

▲신흥리에서 바라본 합미성
▲남쪽 성벽과 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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