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5ㆍ18 민주화운동... 민주주의 위해 항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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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5ㆍ18 민주화운동... 민주주의 위해 항거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20.05.20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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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주년 5ㆍ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이 지난 18일, 광주시 동구 옛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5ㆍ18 유공자와 가족, 문재인 대통령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올해 기념식은 사상 처음으로 망월동 묘역이 아닌 ‘항쟁’ 중심지였던 옛 전남도청 앞에서 열려 더욱더 뜻깊다. 문 대통령은 “광주시민들은 아픔을 넘어서는 긍지로 5ㆍ18의 명예를 소중히 지켜왔다”면서 “정부도 5ㆍ18 진상 규명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특히 “발포 명령자 규명과 계엄군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 헬기 사격의 진실과 은폐ㆍ조작 의혹과 같은 국가폭력의 진상은 반드시 밝혀내야 할 것들”이라고 지적했다. 문 대통령은 “언젠가 개헌이 이루어진다면 그 뜻을 살려가기를 희망한다”며 헌법 전문에 5ㆍ18 정신을 수록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무등경기장을 출발한 200여대 차량 시위는 5월 항쟁의 최대 전환점이다.
▲위생병까지 저항 의지 없는 학생을 곤봉으로 내려쳤다.
▲젊은 남녀가 공수부대가 휘둔 곤봉에 맞아 피흘린 채 끌려가고 있다.
▲헬기가 금남로 전일빌딩 인근 상공을 비행하고 있다.

 

5ㆍ18 광주민주화운동의 의의

5ㆍ18 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 새벽까지 열흘 동안,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당시 신군부 세력의 진압에 맞서 광주시민과 전남도민이 ‘비상계엄 철폐’, ‘유신세력 척결’ 등을 외치며 죽음을 무릅쓰고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항거한 역사적 사건이다.
신군부세력은 1980년 7월 4일 광주민중항쟁을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조작, 발표해 ‘폭동, 난동, 소요, 사태’ 등으로 불리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끈질긴 저항으로 이제는 ‘민주화운동’이나 ‘민중항쟁’으로 불리고 있다. 1996년에 국가기념일로 제정했고 1997년부터 정부 주관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다. 2001년에는 관련 피해자가 민주화 유공자로, 5ㆍ18 묘지가 국립 5ㆍ18 묘지로 승격되어 그 명예를 회복했다. 
광주는 항쟁의 대명사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민주화운동의 원동력이 되었고, 한국 민주주의의 분수령이 되는 1987년 6월 항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1995년 5ㆍ18특별법이 제정돼 전두환ㆍ노태우 등 92명이 내란ㆍ내란목적살인죄 등으로 처벌됐다. 5ㆍ18민주화운동은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고 있는 아시아와 제3세계 민중ㆍ인권운동에 강력한 변혁 의지를 심어준 사건이다. 부당한 국가권력에 대한 시민저항으로 출발, 자치공동체의 형성과 정의를 위한 자기희생과 반인륜적 학살에 저항하는 세계적 인권운동으로 발전해 ‘위대하고 아름다운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러한 중요성으로 5ㆍ18민주화운동 관련 자료들은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2ㆍ12 군사정변…5ㆍ17 계엄 확대

박정희 유신정권은 1979년 10월 16일 ‘부마 민주항쟁’을 계기로 난관에 부딪혔다. 그로부터 열흘 뒤인 10월 26일,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죽게 된다. 군사독재에 신음하던 국민은 박정희 사망을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여명으로 받아들였다.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고 민주화가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1980년 봄을 ‘민주화의 봄’, ‘서울의 봄’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당시 군부 세력을 규합해 온 전두환을 주축으로 한 신군부 일당은 민주화 과정의 과도기를 틈타 집권 시나리오를 진행했다. 전두환 등 신군부는 12ㆍ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했다. 전두환은 80년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돼 국내 정보기관을 장악했다. 
재야인사와 야당 의원들은 ‘계엄해제와 민주화이행’을 요구했다. 23개 대학 대표로 구성된 전국총학생회장단은 5월 10일, ‘비상계엄 즉각해제, 전두환ㆍ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등을 담은 결의문을 포고했고, 거리 시위를 계획했다.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 전두환은 국회와 내각을 무력화하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시국수습방안’을 기획했다. 신군부는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5월 17일 24시에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고, 계엄포고령 10호를 선포해 정치활동 금지령ㆍ휴교령ㆍ언론 보도검열 강화 조처를 내렸다. 김대중ㆍ김영삼ㆍ김종필 등을 포함한 정치인과 학생ㆍ교수ㆍ재야인사 2600여명을 감금하고 국회를 봉쇄했다. 
신군부는 민주화 시위를 강경 진압하기 위해 공수부대에 충정훈련을 실시했고, 5월초부터 군을 이동 배치해 시위진압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들은 민주화 열망을 잠재우기 위해서 그 제물로 광주를 선택했다. 

18일, 전남대 정문 학생ㆍ계엄군 ‘촉발’

18일 아침, 계엄군은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등교하는 학생을 막아 세웠다. 학생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계엄군은 학생들을 구타하고 연행했고, 이를 만류하려던 시민까지 폭행했다. 등교하지 못한 학생들은 계엄군의 폭력을 알리기 위해 전남도청으로 진출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사람들도 도청으로 몰려들었다.
신군부는 신속하고 강력한 시위진압을 위해 오후 4시에 제7공수여단을 투입했다. 제7공수여단은 일반 행인들에게도 무차별 폭력을 가했다. 계엄군은 건물, 버스, 민간 주택까지 사방을 뒤지며 대학생과 젊은이들을 잡아내 곤봉, 개머리판, 군화발로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심지어 대검으로 난자하는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계엄군의 잔인함에 분노한 시민이 거세지고 집단화되자, 계엄사령부는 광주지역 통행금지 시간을 저녁 7시로 조정했다.

19일, 계엄군 실탄 발포…시민 항거

19일 새벽 3시경, 증파된 계엄군 11여단 병력이 광주역에 도착했다.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시민의 저항은 극심해졌고, 도심 곳곳에서 시민과 계엄군의 격렬한 대치와 충돌이 일어났다. 오후 3시경, 광주지역 기관장과 유지들이 시위진압을 완화해 달라고 계엄사령부에 건의했지만, 장갑차와 헬기까지 동원한 계엄군은 발포까지 했다. 11공수여단 군인 1000여명이 3~4명 조를 이뤄 골목마다 누비며 상대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폭행하며 강제 진압했다. 
오후 4시 30분경, 당시 조대부고 학생 김영찬 군이 계림파출소 인근에서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최초 실탄 사격). 전날 계엄군에게 무자비하게 구타당한 청각장애인 김경철 씨도 사망했다. 저녁이 되자 수만명 시민들이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나섰다. 

20일, 도청 앞 집단발포ㆍ헬기 사격

20일 아침 8시, 고등학생들 참여에 자극받은 정부는 광주 시내와 광산군, 나주군 일대 고등학교를 휴교 조치했다. 10시 20분경 광주 가톨릭센터 앞에서 남녀 30여명을 속옷만 입힌 채 심하게 구타했다. 사람들이 모였고, 계엄군은 진압봉으로 이를 저지하려 했다. 
오후 6시 40분경, 금남로에는 버스ㆍ화물차ㆍ택시 등 차량 200여대가 경적을 울리며 시위를 벌였다. 계엄군과 경찰은 최루탄과 가스로 저지하며 탑승자를 공격했다. 사람들은 계엄군의 잔혹한 진압을 규탄하며 광주 상황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방송국에 찾아가 항의했다. 이 과정에서 광주문화방송(MBC) 건물에 화재가 발생했다. 밤 11시경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의 발포로 시민 김만두ㆍ김재화ㆍ이북일ㆍ김재수가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
2018년 국방부 5ㆍ18민주화운동특별조사위원회는 ‘헬기 사격 및 전투기 출격 대기 의혹 조사결과 보고서’에 “5ㆍ18 기간 중 광주에 출동한 육군 헬기 40여대 중 일부가 5월 21∼27일 시민을 상대로 여러 차례 사격했다”고 밝혔다.

21일(수), 시민군 등장…계엄군 철수

21~26일 ‘6일해방구’, 강ㆍ절도 1건 없어
27일, 장갑차 앞세운 공수부대 도청 진압
독일 방송기자, 당시 광주 참상 최초 보도

21일 0시 35분경 노동청 방면에서 군중 2만여명이 계엄군과 공방전을 펼쳤고, 광주역에서 철수하던 계엄군이 대검과 곤봉 등으로 시위대 2명을 살해했다. 
오전 2시, 광주와 외부를 연결하는 전화가 차단되었다. 도심 곳곳에서 계엄군에 의해 처참히 살해된 시신이 발견되었고, 4시 30분 한국방송(KBS) 건물이 불길에 휩싸였다. 8시경, 계엄군 사이에서 오인에 의한 교전이 발생해 군인 다수가 사망했다.
오후 1시경, 전남도청을 향한 시민의 물결은 더욱 거세졌고, 계엄군은 저지선을 돌파하려는 시민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계엄군 저격수는 시민을 조준 사격했다. 계엄군은 시신을 끌어내고 부상자를 병원에 후송하는 시민도 사격했다. 시내 병원에는 환자와 시신으로 넘쳐났다. 시민들도 무장하기 시작했다.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 등 차량을 확보하고 광주ㆍ전남 일대 경찰서와 예비군 탄약고에서 무기를 꺼냈다. 금남로와 충장로에서 벌어진 계엄군과 시민군의 공방은 시가전 양상을 띠었다. 결국, 오후 5시 30분경 계엄군은 전남도청에서 철수하기에 이른다.
21일자 신문들은 ‘광주 일원 소요’라는 제목으로 군경 5명과 민간인 1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전국비상계엄이 선포되자 서울을 이탈한 학원 소요 주동 학생 및 깡패 등 현실불만 세력이 대거 광주에 내려가 사실무근한 유언비어를 날조해 퍼뜨린 데 기인했다”고 계엄사령부 발표 내용을 그대로 보도해 진실을 왜곡했다. 
전남지방경찰청이 발간한 ‘5ㆍ18민주화운동 과정 전남 경찰의 역할’(2017)에 따르면 당시 현장을 목격한 경찰관들은 공수부대의 잔인한 진압방식이 시민 집결의 원인이라고 증언했다. 군 발표와 1988년 이후 피해자 신고서 등 진술에 따르면 이날 도청 앞과 금남로에서만 최소 54명 이상이 숨졌다.

고립된 시민공동체 항전ㆍ왜곡보도

도심에서 물러난 계엄군은 광주 외곽을 둘러싸고 광주와 전남을 오가는 시민을 향해 총을 쏘며 통행을 막았다. 수많은 사람이 계엄군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시민군이 도청을 사수한 21일부터 26일까지의 6일 동안, 광주에서는 시민자치제가 실시되었다. 
치열하게 항쟁했던 현장을 수습하기 시작했고 도청 분수대에서는 매일 ‘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사건 진상과 정황을 알리는 유인물이 배포되었고, 누구나 자유롭게 발언하며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지혜를 모았다. 사람들은 주먹밥과 빵을 대가 없이 나눴고, 헌혈하는 등 공동체를 실현했다. 수습대책위원회를 꾸려 계엄군 대표와 협의를 도출해내려 했지만, 긍정적인 결과를 내지 못했다. 
23일 오후 1시 지원동 주남마을 앞에서 공수부대가 소형버스에 총격해 17명이 사망했다. 
24일 오후 1시 20분경 공수부대원들이 원제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해 4명이 사망했다. 송암동에서는 공수부대와 전투교육사령부 부대 사이에 오인 총격전이 발생해 9명 사망 40여명이 다쳤다. 오인 총격전 직후 공수부대원은 주변 민가를 수색해 마을 청년 4명을 처형했다. 
26일, 계엄군은 탱크를 앞세우고 도청을 향했다. 김성용 신부 등 시민 대표들은 맨몸으로 탱크의 진입을 저지하며 간신히 하루를 버텨냈다. 오후 2시에 학생수습위원회가 광주시장에게 생필품 보급 등 8개항을 요구했다. 저녁 7시 외국인 207명이 광주에서 철수했다. 저녁 7시 10분 시민군은 “계엄군이 오늘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며 어린 학생과 여성들을 귀가 조치했다. 자정을 기해 시내전화가 일제히 끊겼다. 계엄군인 공수부대가 철수한 광주는 치안부재 상태가 아닌 진정한 ‘자치공동체’로 단 한 건의 강도나 절도도 발생하지 않았다. 

27일, 도청 지킨 시민과 계엄군 재진입

27일 새벽 3시경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들이 시내로 진입했다. 광주 도심 곳곳에서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여성의 애절한 시내 가두방송이 울려 퍼졌다. 누구나 버티기 어려울 것임을 알았지만, 많은 시민군이 도청에 남았다. 
새벽 4시 도청 주변은 완전히 포위되고, 시가전이 전개되었다. 4시 10분 계엄군 특공대가 도청 안 시민군에게 사격했다. 1시간 후 계엄군은 시내 전역을 장악했다. 
6시경, 계엄군은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방송하고 7시에 공수부대가 20사단 병력에 도청을 인계했다. 8시 50분경 시내전화가 재개됐다. 
이날 도청에서 얼마나 많은 시민이 죽었는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2001년 정부 발표는 항쟁 당시 사망자는 민간인 168명을 포함해 195명, 부상자는 4782명이다.

광주의 진실 어떻게 알려졌나

신군부의 언론 검열로 1980년 5월 광주를 제대로 전한 국내 언론은 없었다. 언론들은 계엄사령부 담화문 내용을 그대로 보도했다. 광주로 통하는 모든 통신과 교통이 마비됐던 터라, 광주 바깥의 국민은 언론 보도를 볼 수밖에 없었다.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진압한 27일 한국방송(KBS) 9시 뉴스에서는 “군은 생활고와 온갖 위협에 시달리는 시민을 구출하기 위해 오늘 오전 3시 30분경 군 병력을 광주시에 투입했다”면서 “진압하는 동안 도청과 공원 등지에서 폭도들의 저항이 있었으나 오전 5시 10분 광주 일원을 완전 장악”했다고 전했다.
5ㆍ18의 진실은 독일 제1공영방송에서 내보낸 ‘푸른 눈의 목격자’ 위르겐 힌츠페터 씨(작고)의 취재 영상과 5ㆍ18단체, 광주시민들의 끈질긴 진상 규명 운동 등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항쟁 기간 전남도청 앞 광장은 시민들로 가득 메워졌다.
▲부녀자들이 주먹밥 등 음식을 만들어 시민군들에게 제공했다.
▲시민군이 태극기를 휘날리며 시내를 질주하자 시민들이 격려했다.
▲1980년 5월 29일 망월동에서 진행된 129구 장례식.
▲독일 ‘슈피겔’지에 실린 사진. 광주의 아픔을 전 세계인에게 알렸다.

 

사진제공 5ㆍ18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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