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기자들의 군내 및 해외 봉사활동 체험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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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기자들의 군내 및 해외 봉사활동 체험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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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01.12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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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을 안고 사는 사람들
이현(순창고 1년)

장수의 고장으로 유명한 순창에 살고 있는 나는 건강한 삶을 살아가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주위에서 쉽게 만나 볼 수 있다. 이곳의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는 젊은 시설 뼈 시린 가난을 이겨내고 가정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살아가기 위해 열심히 일하셨다. 하지만 그로인해 놓칠 수밖에 없었던 마음 속 작은 꿈들을 지금에서야 하나, 둘 씩 이뤄가고 있음을 느꼈다.

 가장 최근에 만나서이기도 하지만 그분들이 느끼시는 행복함이 내 눈에도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기에 마음속에 인상 깊게 남아있다. 그분들은 학생기자로서 취재하기위해 방문한 마을의 작은 축제 위의 무대에서 뵐 수 있었다. 빨간 드레스에 높은 하이힐과 세련된 검은색 정장과 반짝이는 구두를 신으시고 열정적으로 차차차의 화려한 스텝을 밟으시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몇 십 년을 함께 살아가며 정이 든 사람과 서로 손을 잡고 눈을 맞추며 교감하고 조금의 실수에는 서로 멋쩍게 웃어 보이는 모습에 행복함이 묻어나왔다.

 백이 존재하면 흑이 존재하는 것처럼, 밝음이 존재하면 어둠이 존재하는 것처럼,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행복을 가장한 사람이 있다.

 나는 봉사 동아리의 팀장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한 요양병원과 결연관계를 맺고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꾸준히 봉사를 실천하고 있다. 난 이곳에서 행복한 얼굴로 외롭고 쓸쓸한 마음을 숨기고 사시는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처음 활동을 했을 때 어색한 발걸음으로 들어가 묵묵히 청소하는 나를 보시고 “이 늙은이들 때문에 고생이 많다”고 말씀하시며 연신 고개 숙여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인사조차 적응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말로는 괜찮다고 웃으면서 넘겼지만 낯설고 노인 분들로 가득 차 있는 병원에 대한 두려움이 컸기에 빨리 끝내고 집에 가고 싶은 마음만 들었다.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가방을 꼭 안고 계시던 한 할아버지께서는 청소하는 내 손에 “우리 손녀를 닮았다”고 앞으로도 자주오라는 말씀을 하시며 내 손에 꼬깃꼬깃 접은 이천원을 쥐어주셨다. 내 마음에 크게 자리 잡았던 두려움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은 단돈 이천원 때문이 아니었다. “우리 손녀”라는 그 단어가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그리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그 단어를 내뱉는 할아버지께서는 분명 나를 보며 멀리 있는 손녀를 떠올렸을 것이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잡히는 그 종이 두 장을 느끼면서 할아버지께서 어떤 마음으로 이 돈을 주셨을지 생각에 잠겼다. 그 할아버지께서는 자신을 찾아오지 않지만 나의 어린 핏줄이자 늘 잊지 못하는 손녀에게 용돈을 주지 못한 미안함을 전했다.

 이제는 그곳에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친해져 밥도 먹여드리고 산책도 시켜드린다. 함께 앉아서 보는 TV에서 부유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자 너도 나도 자식자랑을 하셨다. 자식들 이야기를 하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는 성공한 자식들이 자랑스럽고 고생하지 않아서 마음이 너무 편하고 행복하다고 늘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누구나 다 내가 느꼈던 감정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진정 행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아마 그 분들은 성공했지만 자신을 시골 병원에 두고 찾아오지도 않는 자식들이 야속하고 미울 것이다. 또, 내가 업어서 키운 그 아이들이 보고 싶고,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을 것이다.

 이렇게 봉사활동을 하면서 나는 과연 미래에 어떤 딸이 되어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절대 이런 곳에 엄마, 아빠를 두지 않겠다고, 내가 옆에서 늘 보살펴 줄 거라고 다짐했다. 피곤한 일상을 마치고 돌아온 집에서 엄마와 아빠의 잔소리를 들으며 싸울 때도 있고, 아플 때 내 옆에서 지켜주는 엄마, 아빠를 보며 한없이 고마울 때도 있다. 무한한 사랑을 받는 우리가 엄마, 아빠의 사랑에 보답하는 방법은 부유한 생활은 아니더라도 외롭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지역사회에서 소외 된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돌보는 봉사활동은 계속 이뤄질 것이다. 이 활동은 봉사활동 시간을 채우기 위한 단순한 봉사활동이 아닌 내 가슴으로 느끼고 그분들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게 되는 시간으로 남고 있다. 앞으로의 활동을 통해 그분들이 마음속에 품고 계신 깊은 그리움을 웃음으로 승화시켜드리고 싶다. 그 웃음이 설령 가장된 웃음일지라도 서로의 웃음을 보며 조금이나마 그리움을 달랬으면 한다.

 

꿈과 사랑속으로
이재민(순창고 2년)

 캄보디아에 가기 전 걱정 반, 기대 반을 했다. 왜냐하면 준비기간도 없이 며칠 만나고 준비도 완벽하게 하지 않은 채 캄보디아에 가서 잘 할 수 있을까? 캄보디아 사람들과 우리들이 서로간의 문화를 많이 알고 이해할까? 하는 걱정들과 함께 캄보디아의 문화, 먹거리, 유적지, 색다른 봉사경험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내 걱정이 너무 많은 참견이었을까. 완벽히 각자 맡은 일과 준비를 철저히 해 주어서 깔끔하고 후회 없는 봉사를 했다.

 저녁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캄보디아의 밤은 덥고 습한 그 자체였다. 그곳의 날씨는 밤 10시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한국의 낮 기온을 생각나게 했다. 다음 날 아침, 넓은 들길을 헤쳐 지나가 노란색의 건물이라고도 하기 힘든, 제대로 된 창문하나 없는 공간은 6명의 보모와 70명의 아이들이 생활하는 탁아원이었다. 아이들과의 첫 만남, 아이들이 문간에 기대어 우리를 신기한 눈초리로 바라보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루 종일 먹는 음식이라고는 탁아원에서 주는 아침 죽과 점심이 전부인 아이들은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어느 보석보다도 반짝이던 아이들의 눈망울을 보며 행복은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다섯 시간의 긴 이동, 바탐방 초등학교에서의 봉사활동이 시작되었다. 1ㆍ2학년이 전부인 그 곳의 아이들 중에는 어린 동생을 업고 학교에 온 아이들, 자신보다 어린 동생들과 뒤늦게 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 모두 앞에 나와 노래를 부르며 우리를 반겨주고 있었다. 아이들의 환영을 받으며 서로 인사 후 우리는 미술과 음악팀으로 나뉘어 미리 준비한 수업을 진행했다. 미술팀은 다음날 함께 할 체육대회에 입을 티를 만들었고 음악팀은 대표적인 한국 동요인 ‘곰 세 마리’를 캄보디아어로 번역을 해서 율동과 함께 가르쳐 주었다. 아크릴 물감을 묻혀 각자 자신만의 티셔츠를 만드는 활동은 아이들도 우리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아이들이 만든 형형색색의 티셔츠는 다음 날 우리의 단체티가 되어 체육대회를 더 단결시켜주었다.

 마지막 일정인 원광 한국어 교실에서 우리는 우리 또래의 학생들을 만나 그들과 이야기하고 수업하며 교감하고 소통하는 시간을 가졌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어에 대한 공부를 하는 그 사람들은 하나같이 여유롭고 순수한 미소를 갖고 있었다. 또 한국의 전통 문화(한복입히기, 제기차기, 딱지치기)를 알림으로써 문화 간의 이해가 많이 오간 것 갔다. 무조건 빨리, 급하게 일을 처리하려는 한국에서의 우리가 아닌, 그들과 함께 있으며 어느새 에어컨보다는 자연 바람을 좋아하게 되고 핸드폰보다는 축구공 하나가 우리를 하나로 만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곳 아이들이 너무 이쁘고, 귀엽고, 말도 잘 들어서 추억과 정이 많이 남았지만 우리나라를 알려줄 수 있는 한국어 교육이 가장 행복했었던 것 같다. 내가 아는 단어를 알려주면 너무 열심히 받아 적고, 또 그 단어를 활용해서 노래를 부르면서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행복한지 마음이 뿌듯하고 한국에서는 느낄 수 없는 황홀한 느낌을 받았다. 남을 도와주고 이런 뿌듯함을 느낀다면 이 한 몸 해외 봉사에 몸 받칠 생각이었다. 나중에 또 기회가 된다면 몇 달, 몇 년 머무르면서 활동 하고 싶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역시 노력봉사였다. 나무기둥 페인트칠하기, 벽 칠하기, 나무심기 모두 처음해보는 활동이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햇볕이 쨍쨍 내리 쬐는 상태에서 처음 하는 것이라 너무 서툴렀다. 나무를 심을 때는 비가 와서 진흙 속을 파고 나무를 심었는데 신발이 진흙 속으로 푹푹 들어가서 힘들었다. 노력을 하면 그에 따른 보상이 있으리라는 말이 딱 맞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열심히 일한 후 우리들의 성과물을 보면 그렇게 뿌듯하지 않을 수 없다. 김빠진 콜라에 다시 김이 찬 느낌이었다.

 이번 봉사활동을 통해서 인생의 변환점, 즉 터닝 포인트를 찾은 것 같다. 내 성격과 행동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들 앞에서 노래도 못 부르고 이야기도 당당하게 하지 못했던 내가 새로운 인간으로 진화를 했다. 세상이 공부를 우선 요구하지만 한번쯤은 더 넓은 세상에 나가서 눈을 넓혀 오는 것도 하나의 좋은 공부방법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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