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못 다 이룬 꿈, 부모 가슴에서 자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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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못 다 이룬 꿈, 부모 가슴에서 자라다
  • 조남훈 기자
  • 승인 2012.10.31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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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잔함 깃든 우리네 장례풍속, 아장살이

사람이 생을 마감하는 것이 가족과 이웃에 기쁜 일은 아니나 천수를 다하고 가는 노인에 대해 사람들은 때로 ‘잘 가셨다’는 말을 한다. 죽음에 빗대어 잘 간다는 소리가 좋게 들릴 리 없음에도 가족들은 이를 칭찬으로 받아들인다. 잘 가셨다는 말은 곧 잘 모셨다는 의미도 된다.

이와 대비된 유난히 슬픈 죽음도 있다. 아이의 죽음에는 가장 깊은 꿈과 상처, 애절함이 들어있다. 역병으로, 사고로 자식을 잃은 부모는 장례도 조용히 치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을 잃고 가슴이 무너진 부모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좋아했던 물건을 손에 쥐고 저고리도 입은 아이는 아버지 품에 안긴 채 산으로 갔다. 삿갓을 쓴 아비의 모습을 발견한 이웃 아낙은 먼발치서 바라만 봤다. 갈 때는 셋이었지만 올 때는 둘이었다. 아장살이였다.

전쟁 전후로 줄어들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아장살이에 대해 많은 노인들은 알면서도 언급을 꺼려했다. 복흥면의 한 노인은 “애들 죽는 일이 집에 좋을 리 없으니 알아도 모른 척 넘어가는 것이 도리라고 여겼다”고 말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마을마다 묵시적으로 아이를 묻는 장소는 대체로 정해져있었다. 마을 야산이나 화전 밭 어귀는 으레 아장살이 터로 이용되곤 했다. 자식을 묻은 부모는 틈만 나면 돌무덤을 찾는 사람과 근처에도 안가는 부류로 나뉘었다. 그러나 가슴에 품은 애잔함은 같았고 남편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어머니는 며칠 밤을 눈물로 보냈다.

유등면 창신리에 사는 한 주민은 “한전 앞 야산에 아장살이 밭이 있었다. 읍에 나갔다가 밤에 넘어오는 사람들 중에는 죽은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는 사람도 여럿이었다. 홍역이라도 닥치면 마을에 아이들이 서너 명만 남는 경우도 있었다. 아장살이는 끝이 없었다”고 전했다.

부모들은 인적이 뜸한 저녁시간에 아이를 묻었다. 봉분대신 돌이 있는 땅을 얕게 파고 행여나 동물들이 해칠까봐 돌무덤을 올렸다. 군에서는 대체로 항아리에 아이를 넣고 묻은 후 돌을 쌓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이마저도 못하는 가정도 있었다. 마화룡 농업경영인회장은 “독에 넣는 것은 부유층이 예의를 갖출 때였고 없는 집안에서는 신발도 못 신기고 멍석에 말아 장사지내기도 했다. 어릴 적에 그런 항아리를 많이 봤다. 사람 뼈를 동물 뼈인 줄 알고 갖고 놀 정도로 흔해 어른들도 뭐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전쟁 후 한국사회가 격변기를 거치는 동안 아장살이의 흔적은 점차 사라져갔다. 의학이 발달되고 영아사망률이 줄었으며 성인은 묻고 아이는 화장하는 일도 많아졌다. 아이의 못다 이룬 꿈은 산에 머물다 강으로도 갔다. 그러나 아장살이는 여전히 부모의 가슴에서 진행 중이다.

산에서, 밭에서 깨진 항아리를 본다면 한 번쯤 아이의 영혼을 위로하자. 죽음으로 하여 생명이라는 말은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꿈이 컸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았던 그는 어쩌면 자신에게 예정된 값진 삶을 우리에게 양보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장살이란?
아기를 장사한 곳을 뜻하지만 실상은 그 무덤을 부모님들의 마음에 두고 가슴 아파하며 못다한 아기의 생을 위로하고 애닯아 했던 우리 고유의 문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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