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앞에 지조와 절개를 굽히지 않았던 임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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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앞에 지조와 절개를 굽히지 않았던 임선미
  • 김슬기 기자
  • 승인 2013.05.02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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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충신 순창 임씨 ‘임선미’ 선생 추모제

▲순창 임씨 임선미 선생의 추모제가 지난달 26일 호계사에서 열렸다. 이날 임래열 도유사 주재로 열린 추모제에는 순창임씨 종친회 60여명이 참석했다. @사진제공 전은신 군 기획실 군정홍보사진 담당
고려 말 충신으로 새 왕조에 타협하지 않으며 지조와 절개를 굽히지 않은 두문동 72현. 그 중심에 선 젊은이 임선미(林先味).
순창을 충절의 고장이라 불리게 한 임선미 선생의 추모제가 지난달 26일 인계면 호계마을의 호계사에서 개최됐다. 이날 순창 임씨 종친 임래열(구림 자양) 도유사 주재로 열린 추모제에는 순창임씨 종친회 60여명이 참석, 엄숙한 분위기로 진행됐다.
매년 화려한 꽃들이 피었다 지는 음력 3월 17일이면 호계사에서는 두문제 임선미 선생의 강직한 절개와 덕의를 기리는 추모제를 올린다. 순창에 살면서도 학생들이나 젊은이들은 잘 알지 못하는 ‘임선미’는 고려 말 두문동(杜門洞) 72현(賢)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애국충절과 효심이 깊은 강직한 성품을 가졌다고 전한다.

고려와 운명을 같이한 ‘두문동 72현’
임선미를 중심으로 뜻을 같이 한 두문동 72현은 조선개국에 반대한 고려의 유신들이었다. 공자의 제자로서 다수의 현인을 뜻하는 말로 흔히 쓰이기도 하는 이들 72현은 고려의 멸망과 함께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두문동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지금의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기슭에 해당하는 두문동은 이때부터 두문동이라는 지명을 갖게 됐다.
왕위에 오른 이성계는 두문동 72현을 조정으로 수차례 불러들이려 애썼지만 이들은 한 치의 타협 없이 단호했다. 어떻게든 밖으로 나오게 하기 위해 시험장이 훤히 보이는 경덕궁에서 과거를 치르기도 했지만 두문동 72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화가 난 이성계는 두문동에 불을 질렀다. 도망쳐 나올 것이라 예상했지만 임선미를 비롯한 72현은 불길에서도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그들은 불길에 몸을 던져 고려와 운명을 함께 했다.    
일상생활 속에서 흔히 쓰는 두문불출(杜門不出), 문을 닫고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 이때부터 쓰이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두문동에서 세상 밖으로의 왕래를 끊다’는 말이 시초가 되어 요즘은 집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알고 보면 ‘순창’과 인연이 깊은 말이었다.(다만, 두문불출이라는 표현이 조선왕조의 성립인 1392년보다 250년 앞선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등장하고 1500년 앞선 사마천의 사기에도 쓰인 것을 보면 고려말 72현에 의해 생긴 것은 아니란 학설도 있음)

▲호계사에 있는 임선미 선생 비석과 사당의 모습. @사진출처 blog.daum.net/noinbokji/6811771
승국충신면계세(勝國忠臣勉繼世)
두문동 72현에 대한 언급을 금했기 때문인지 실록 등 공식적 문헌에 이들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영조실록에 영조 즉위 16년, 송도로 제릉과 후릉을 참배하러 가던 영조가 “부조현(不朝峴, 왕에게 알현하지 아니하고 넘어간 고개 즉 조선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한다는 의미)이 어느 곳에 있으며 그렇게 명한 이유”에 대해 묻자 신하들은 “부조현은 개성의 대족 50여 가문이 과거에 응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으로 그 동리 또한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는 뜻의 두문동이라 명하였다”고 답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영조는 부조현 앞에서 “말세에는 군신의 의리가 땅을 쓴 듯이 없어지는데 이제 부조현이라고 명명한 뜻을 듣고 나니 비록 수백 년 후이지만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을 보는 것과 같이 오싹함을 느끼게 한다”면서 칠언시 한 구를 쓰게 했다고 한다. 승국충신면계세(勝國忠臣勉繼世). ‘고려의 충신들처럼 대대로 계승되기를 힘쓰라’는 뜻이다. 또 ‘부조현’이라 쓴 비석을 세우고 영조 27년에는 두문동 72인들의 제사를 지내도록 명했다. 또 어필(御筆)로서 ‘승국충신금언재 특수기동표기절(勝國忠臣今焉在 特竪其洞表其節)’, “고려의 충신이여 지금 어디에 있는가. 특별히 그 동리에 비석을 세워 그 절의를 표하노라”라고 써서 내리고 비석을 세울 것을 명했다고 한다. 제문(祭文)에는 “이름은 비록 다르나 그 뜻을 취함은 같으니 오직 조(曺)와 임(林)과 맹(孟) 성(姓) 세 사람만이 이름이 전하고 나머지는 기록이 되지 못하였도다. 내가 옛날에 이곳을 지나가다가 유지(遺址)를 물어본 적이 있는데 지난날을 생각하니 감회를 그칠 수가 없구나. 사적이 점점 오래되고 문헌이 없어져 후세에 권장을 하려해도 표석이 없으므로 특별히 큰 글자 14자를 비석에 새겨 나의 뜻을 나타내었노라. 남긴 충렬을 생각하여 후손을 찾아내어 방위를 정하여 제단을 설치하고 깨끗하게 제수를 장만하여 제사를 드리노라”라고 나와 있는데 이 중 ‘임(林)’이 바로 ‘임선미’다.

지조 있는 순창 임씨 ‘임선미’
출세를 위해 목숨만 빼고 무엇이든 바치는 사람은 많다. 충ㆍ효ㆍ예를 인간의 도리로 알고 목숨까지 바치며 지조를 지킨 ‘임선미’. 지금에 와서는 그의 충절과 절개를 높게 평가하지만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죽음을 택한 선조 때문에 순창 임씨 후손들은 억압 받고 괄시 받으며 크게 출세하지 못했다.
권력 앞에 지조와 절개를 굽히지 않고 죽음을 택한 임선미. 그리고 두문동 72현. 매년 봄, 꽃들이 저마다 빛을 뽐내다 시드는 음력 3월 17일이면 서른셋 젊음을 꽃피우다 간 임선미가 떠오를 것이다.                

<참고자료>
전국임씨중앙회 회보(제16호) ‘문정공 임선미 충의사 행적-임동락’/ 주간동아 516호 ‘순창 임씨와 임선미-허시명’/ cafe.naver.com/insanwoo/749 두문동 칠십이현 명부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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