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곡 양만정 향토사학자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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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곡 양만정 향토사학자 타계
  • 남융희 기자
  • 승인 2013.05.30 12:30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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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을 딛고 희망으로 이어온 ‘86년 삶의 여정’ 마감

 

향년 86세.
한 평생을 교직에 몸담고 향토사학자, 보학(譜學)의 대가로 불리시던 현곡 양만정(사진) 선생이 올 초 간행된 자신의 회고록 제목처럼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나의 삶’을 마감하고 지난 24일 타계하셨다. 빈소는 전북대학교병원 장례식장, 26일 발인하여 익산의 선영에 묻히셨다.
일제 강점기(1928년) 때 태어나 건국, 전쟁, 중흥, 군부독재, 민주화 시대를 살다 가신 선생님은 ‘국내외적으로 변화가 많았던 혼돈의 시대’를 살아온 지혜는 “자기 혼자만 살아남으면 되는 이기주의적인 방법이 아니라 어느 길이 옳은 지 나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게도 이로운 길인지를 판단해야만 하는 것”이라며 “선조들의 발자취를 교훈삼아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더 나은 인생”을 살아갈 것을 당부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부친으로부터 배운 우리나라 역사를 필생의 업으로 삼고 교직에 있는 동안이나 퇴직 후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공부해 왔다”는 선생님은 부친의 엄한 가르침 덕에 역사와 한문의 조예가 남달랐으나 본격적으로 공부하겠다고 다짐한 것은 마흔을 넘긴 때였다고 술회했다. 출퇴근용 자전거 뒷자리에 서적을 싣고 다니면서 틈틈이 공부했다는 선생님은 중풍으로 수년간 자리보전을 하셨던 “아버지의 벗이 되어 드리고 손이 되어 한문으로 붓글씨를 쓰려면 한문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그 시절을 회고 했다. 이렇듯 한문 공부에 매진한 선생님은 전북대학교 사학과 송준호 교수와 철학과 이강오 교수를 ‘스승이자 벗’으로 삼아 교제하며 서로 아는 것을 나누는 즐거움을 만끽하기도 했다. 선생님은 1995년에는 중국 북경대학 초청 강연을 했고 2011년에는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 근현대 자료 구술사 수집 편찬사업’에 참여하여 ‘호남지역의 명문가와 후예들’을 주제로 구술한 내용이 책으로 발간되기도 했다. 선생님의 일본 땅에 방치된 애국자 정문부의 북관대첩비 반환 활동과 ‘조선왕조신록’의 온전한 보전을 위해 잘못을 바로잡은 일 등은 학자로서의 양심으로 노력한 일로 평가된다.
선생님의 부친(양병익)은 동계면 구미리에서 태어나셨지만 선생님은 관전리에서 태어났다. 5남2녀 가운데 여섯째로 태어난 선생님은 1948년 결혼해 슬하에 3남2녀를 두었다. 적성초등학교을 거쳐 순창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1947년 제3종 교원시험에 합격하여 모교인 적성초등학교에 부임했으나 이듬해 ‘교장배척사건’으로 선생님의 백부(큰아버지)가 사는 부안초등학교로 자진 전근하여 부안에서 살게 되었다.
선생님은 “자식은 부모가 못해준 것만을 기억하고, 부모는 자식의 잘한 것만을 기억한다”며 그러나 여든여섯이 되고 보니 “아버지가 무서웠던 기억보다 현명하고 지혜롭게 가르침을 주시던 기억이 더 많이 난다”며 “부모와 자식은 그런 것이다”고 회고했다.
선생님은 회고록 서문에서 ‘교육자’ 보다는 ‘학자’로 인정해 주는 이들이 있어 “평생토록 행복했다”며 “이 모든 것이 내 나이 마흔을 넘어서 시작한 공부에서 비롯됐다. 무엇을 하든지 너무 늦었다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먼저 용기를 갖고 도전하라”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의 ‘절망을 딛고 희망으로 이어온 86년 삶의 여정’은 그가 올해 초 간행한 회고록 제목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나의 삶’이 되어 그를 따르던 후학과 향우들의 가슴 속 깊이 자리잡으며 그리움을 달랜다. 

 

<추도사>

예로부터 소만(小滿)과 입하(立夏)에 이르는 시기를 여름 기운이 나는 시절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저는 고향사람들과 성대한 체육행사를 치르고 난 뒤 잠깐 고향생각을 멈추고 일상으로 돌아와 있던 중에 현곡 선생님의 별세 소식을 들었습니다. 물론 선생님의 환후와 춘추에 대해 사전 연락이 있었으나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급하게 몇몇 분께 전화를 올리고 빈소인 전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순창군 동계면 관전마을에서 나시고 유ㆍ소년 성장을 적성면에서 했다면서 남원양씨 세 거주지인 동계 구미를 중심으로 동계ㆍ적성ㆍ인계는 이웃마을이라고 자주 강조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뵐 때마다 느낄 수 있는 자상하심이 정말 크시고, 한자를 모르는 후배나 친지들에게는 문구하나 획수 하나에 담겨져 있는 심오한 의미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비법이 있었으며 여러 강연이나 묘정에서 전해 주시느라 항상 분주하셨던 모습이 제일 먼저 기억됩니다.
사단법인 옥천향토문화사회연구소에서는 창립 3주년을 기념한 지난 1993년 9월 19일, 현곡 선생님을 향토사학자로 추대했고 그 때부터 선생님은 매월 순창읍내 사무실에서 연구소의 후학은 물론 향토 문화와 보학(譜學)에 관심이 있는 많은 분들을 지도하여 주셨습니다. 강의를 들은 분들은 모두가 “보학의 대가이시며, 옥천향토문화연구소의 명실상부한 기둥이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순창농림학교를 졸업하시고 교직을 시작하시어 정년퇴직을 하실 때까지 수많은 제자를 보살피며 열정을 불태우셨던 시절의 여러 일화들은 지난 3월에 발행된 선생님의 회고록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나의 삶’을 읽으며 감동하며 상기할 수 있었으며 그 과정에 선생님이 저술한 책자를 한 권씩, 한 권씩 읽어 나갈 것을 다짐하여 봅니다.

선생님은 임지였던 순창, 부안, 익산, 군산, 전주 지역의 향토문화 모든 분야를 정확하게 아시는 지라 매일 매일 후학들로부터의 질문과 저술, 강연으로 쉬지도 못하며 지내셨다고 가족과 친지들은 전합니다. 초등학교에서 평교사로 두각을 나타내어 장학사로 발탁이 되었고 여러 학교 교직원을 독려하며 지낸 동안에는 관련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우덕ㆍ고성ㆍ부안ㆍ익산동북ㆍ줄포 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임하셨고 부안군교육회장에 피선되고, 국사편찬위원이 되시어 남기신 업적은 후대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성씨를 총 망라, 이해하시는 박학다식은 어느 장소에서도 사전 준비 없이 명쾌한 설명을 붙이는 모습에 감탄하여 여러 사람들의 존경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일상에서도 용어의 잘못된 사용을 지적하고 바로잡는 것에 솔선수범하시니 주변 분들의 감사함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전북대학교병원에 마련된 빈소에는 옥천향토문화연구소에서 선생님과 함께 활동해 온 한용수 초대이사장, 김주곤 전 순창군의회 의장, 권문길 전 순창읍장과 여러분들이 계셨습니다. 선생님의 삼남인 양규혁 전북대 상과대학장의 “가시는 순간까지 평온하셨다”는 전언에 일말의 위안이 되었고, 운명하시기 전날에도 평소처럼 통화했다는 선생님의 오랜 친구 박남재 화백은 “꿈 만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서울에서 내려간 옥천향토문화연구소 김종세 회장과 노시선 부이사장의 헌화에 이어, 선생님께서 태어난 순창 동계에서 오신 친지들의 분향이 이어지고 빈소 입구는 많은 후학들이 순서를 기다리며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빈소를 끝까지 지키지는 못했지만 선생님의 소천을 함께 슬퍼하는 옥천향토문화연구소와 남원양씨서울종친회 회원들은 선생님의 강연 속 강직한 목소리를 오랫동안 기억할 것입니다.
현곡 선생님의 가족들께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올리며 회고록에 있는 선생님의 교육철학을 인용하며 추도의 글을 마칩니다.
‘교사들은 자율적으로 행동하게 하고, 학생들은 즐겁게 생활하게 한다.’
아직 여름이 아니지만 태양이 작열하여 기온도 성하 방불케 하여 여름인가 하였습니다.
2013. 5. 25
양완욱 올림

양완욱씨는 옥천향토문화연구소 사무처장, 남원양씨서울종친회 재무이사를 맡고 있다.
 

● 양만정 선생의 걸어온 발자취

연보
1928. 11. 10. 동계면 관전리 출생
1947.  9. 20. 순창농림학교 졸업
1947.  9. 30. 초등(국민)학교 제3종 교원시험 합격
1947. 10. 20 ~ 1960.  4. 22. 순창적성, 부안, 전주완산 초등학교 교사
1960.  4. 23 ~ 1964. 10. 30. 고성, 행안 초등학교 교감
1964. 11.  1 ~ 1972.  6. 15. 부안군교육청 장학사
1972.  6. 16 ~ 1994.  2. 28. 우덕, 고성, 부안, 이리동북, 줄포 초등학교 교장
1982.  9. 20. 부안군교육회 회장 피선
1985. 10.  1. 전북향토문화연구회 이사 피선
1988. 11.  1.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위촉
1989. 12.  1. 한국고문연구회 회원
1986. 12.  5. 국민훈장 목련장 수상
1994.  3. 20. 국민훈장 동백장 수상
1997.  8.  1 ~ 2002.  8.  1. 전북향토문화연구회 회장

 

저서
1982 「변산의 얼」 공저
1985 「부안의 얼」
1994 「향토사 논문집」
2001 「충의와 절의」
2003 「부안에 살고 있는 성씨고」
2013.  회고록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나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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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beth 2013-06-28 21:4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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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y 2013-06-28 17: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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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gaogelo 2013-06-26 10: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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