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끝나지 않은 4ㆍ19, 5ㆍ18, 6ㆍ10 항쟁
상태바
[그날] 끝나지 않은 4ㆍ19, 5ㆍ18, 6ㆍ10 항쟁
  • 임양호 편집인
  • 승인 2013.06.14 11: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민주화는 가장 중요한 시대정신 … 지켜야 할 가치

2013년 6월이 간다.
1960년 4ㆍ19혁명, 1980년 5ㆍ18, 1987년 6ㆍ10 항쟁은 끝나지 않았다.
청년 학생들이 참여한 4ㆍ19의거가 독재ㆍ부정한 정권을 갈아엎고 새 정부를 이뤄냈으나 이듬해 맥아더 안경(검은색 선글라스) 쓴 군인들의 쿠데타로 어이없이 무너졌다.
2년의 군정, 18년의 철권정치는 1979년 10월 26일 이른바 ‘대통령시해사건’을 불러왔다. 이어 ‘정치군인’들의 발 빠른 정권욕은 그해 겨울 12ㆍ12사태를 통해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이 군권은 물론 정치적 실권도 장악했다. 그러나 12·12사태는 1997년 대법원 판결에서 군사반란으로 확정됐고, 1998년 교과서에 이러한 내용이 명확히 추가됐다.
신군부세력은 정권을 잡기 위해 1980년 5월, 광주에서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했다. 5ㆍ18 광주 민주시민들의 무장 항쟁은 한국 현대사의 전환점이었다. 오월항쟁의 민주시민들은 오랜 세월 ‘폭도’와 ‘난동자’로 모욕당했다. 심지어 신군부 쿠데타 주모자들은 오월항쟁을 ‘북 간첩”과 연계시키는 여론 조작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법원은 “신군부 세력은 광주 민주화운동을 북한과 연관된 것처럼 여론조작을 하기 위해 허위사실을 유포했다”고 결론 내렸다.
33년이 지난 2013년 5월에 조선일보가 운영하는 종편 <티비(TV) 조선>과 동아일보의 <채널에이(A)>가 ‘극우 인사’들과 탈북자들을 출연시켜 5·18 관련 ‘북 특수부대 개입설’을 방송으로 내보냈다. 두 종편은 여론이 악화되자 뒤늦게 유감을 표명하며 수습에 나섰지만 문제는 두 신문사의 종편방송만이 아니다. ‘우익’을 자처하는 네티즌들의 글에서 더욱 분을 참을 수 없다. 5ㆍ18 희생자의 사진에 “홍어 말리는 중”이라는 악담을 퍼붓거나 시신을 담은 관을 두고 “홍어 택배 중”이라고 써댄 야만은 경천동지(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뒤흔든다)할 망언이다.
이런 현상은 지난 대선 결과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유신시대와 80년대, 민주화를 지지했던 현재의 50대는 지난 대선에서 정치적 구도보다는 현실적 대안을 중시하는 정책적 구도를 택한 것으로 분석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사회양극화를 강화했으나 양극화 해소를 위해서는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구축이 요구돼 왔다. 위기의 중소기업ㆍ자영업ㆍ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며, 5대 불안(일자리ㆍ노후ㆍ주거ㆍ교육ㆍ가계부채)의 해소가 시급하다는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러한 흐름이 “민주화는 더 이상 국민 다수가 공감하는 시대정신이 아니고 집합적 가치로서의 의미를 잃어온 것”이라는 분석을 낳게 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화는 유신체제 이래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시대정신이었다. 4월혁명에 역사적 기원을 둔 민주화 열망은 유신과 전두환 정권에 맞서 학생ㆍ노동ㆍ농민운동을 추동했다. 1980년 광주항쟁을 거쳐 1987년 6월항쟁에 이르러 군부정권을 종식시키고 민주화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시대정신인 ‘민주화’의 가치가 퇴색돼 가고 있다. 슬픈 일이다. 더구나 전두환 정권의 민정당인 뿌리인 새누리당까지 ‘민주화세력’을 자처하고, 극우성향 인터넷 ‘일간베스트’에서는 ‘민주화’를 “다른 소수를 집단으로 폭행하거나 언어폭력을 하는 것”을 일컫는 은어로 쓰이고 있다.
군사독재정권을 붕괴시킨 그 엄청난 힘이 어디서 왔는지 잊어버리고, 개인주의를 민주주의로 착각하면서 우리는 과연 행복한가. “힘없는 사람을 위해 대신 목소리를 내고, 세상을 좋게 만드는 일” 한 가지만을 해 왔다는 한 민주화운동 활동가의 말이 귓 속을, 가슴 깊은 곳을 파고든다.

<사진으로 본 민주화운동>

 

● 통일운동의 상징, 한반도기(1993. 6)
한반도기를 앞세우고 6ㆍ12 남북학생회담(1993)을 위한 가두 행진을 준비하는 학생들.
그러나 당시 회담은 정부의 불허로 성사되지 못했다. 이에 북한은 평양방송 논평을 통해 “새정부 출범 이후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을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6ㆍ12 남북학생회담과 8ㆍ15 제4차 범민족대회를 불허한 것”과 “연방제통일방안,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 특사교환 제의를 거부한 것” 등을 열거하면서 “문민정권을 표방하는 현 정권(김영삼 정부)이 5ㆍ6공 정권과 다름없는 파쇼 정권임을 보여주고 있다“"고 비난했었다.
● 민주화운동 함께한 태극기(1987. 6)
태극기를 앞세우고 마스크를 한 채 호헌철폐를 외치고 있는 시위대의 모습.
6월 민주항쟁은 1987년 6월 10일부터 6·29선언이 있기까지 약 20일 동안 계속된 민주화시위다.
대통령 전두환이 개헌논의 중지 등 이른바 ‘4·13호헌조치’를 발표하자 비난 여론이 빗발쳤고 재야와 통일민주당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를 발족시키고 6월 26일 평화대행진을 강행했다.
6월항쟁중 최대 규모인 이날 시위는 결국 '6·29선언'을 일궈내 직선제개헌과 제반 민주화조치를 약속케 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 민중 편에 선 목사님(1993. 6)
종로에서 거리행진을 하며 5ㆍ18 진상규명 등을 촉구하는 목회자정의평실천협의회 소속 회원들.
1972년 10월유신 이후 반독재 투쟁의 중심 장소가 된 곳은 종로5가 기독교회관이었다. 매주 목요기도회를 통해 고난받는 지식인, 학생, 노동자, 도시빈민의 실상을 전했다. 1953년 6월 10일 진보적 성향의 목사들을 중심으로 한국장로교회 개혁을 기치로 내걸고 출범한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는 '인간화'와 '교회의 사회화'란 선교이념을 따라 민주화·인권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1980년대 민중교회운동의 핵으로 떠올랐다.
● 6월항쟁에 나선 스님들(1987. 6)
서울 조계사 입구에서 열린 민주화를 위한 구국대법회에 나선 민주헌법쟁취불교공동위원회.
1980년 10ㆍ27법란으로 불교계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일부 승려들이 반정부 시위에 나서기 시작했고 재가 신도들도 반독재 투쟁에 동참했다. 1980년 10월 27일 새벽, 전국 사찰에 계엄군을 투입해 스님과 재가신도들을 강제로 연행했다. 당시 군부는 불순분자와 군 기피자 등을 색출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국민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술수였다. 강제 연행된 스님 중 상당수는 무차별 폭력과 고문을 받았고 죽임을 당한 이도 있었다.
● 5ㆍ18 광주항쟁, 상징적 장소 금남로(1990. 5)
1990년 5월 18일 광주 금남로 일대를 가득 메운 수많은 사람들.
5ㆍ18항쟁, 33주년인 올해, 일부 보수언론과 단체들이 5ㆍ18에 대하여 ‘북한군 연루설‘과 5월 희생자들을 폄하 매도하여 공분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왜곡 선동은 채 아물지 않은 피해자들의 상처를 파헤치며 민주화운동의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한다. 그러나 사실무근의 허무맹랑한 주장을 일삼는 자들을 단죄해야 할 박근혜정부의 태도는 단호하지 않게 보인다.
● ‘수입개방 막아내어 천만농민 살려내자’(1998, 4)
1998년 광화문 일대에서 농축산물 수입 반대 연좌시위를 하는 농민들.
‘천만농민’ 구호가 무색하게 최근 통계에 따르면 '농민인구 300만선'이 붕괴되었다. 우리 농촌ㆍ농업은 위기를 넘어 이미 붕괴 상황에 있다.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타결 이후 밀어 닥친 수입개방 농정은 쌀을 제외한 전체 농산물의 국내 자급률을 평균 4% 수준으로 추락시켰다. 7000만 국민의 생존권을 위해서 더 이상 농업ㆍ농촌의 붕괴를 방치해선 안 된다.

 

*@자료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이 경향신문사와 박용수 선생님으로부터 동의를 받아 위탁 관리하고 있는 사진을 전재하였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금과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식 4월 21일 개최
  • 금과초 100주년 기념식 ‘새로운 백년 기약’
  • [순창 농부]농사짓고 요리하는 이경아 농부
  • “이러다 실내수영장 예약 운영 될라”
  • [열린순창 보도 후]'6시 내고향', '아침마당' 출연
  • ‘카페 자연다울수록’ 꽃이 일상이 되는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