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옥 어르신의 밥보다 ‘술’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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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옥 어르신의 밥보다 ‘술’사랑
  • 김슬기 기자
  • 승인 2013.11.01 15: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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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동안 담가온 ‘약술’ 비법 보유자
어석어석 해지기 시작허믄 재미지제 하~암!

 

▲인계면 지산마을, 70년 동안 자신만의 비법으로 약술을 담가온 공정옥(89) 어르신이 환하게 웃고 있다.

“밥은 바빠서 못 먹겠고 죽은 죽어도 못 먹겠고 떡은 떡떡해 못 먹겠고 술은 술~술 잘도 넘어간다!”
싫은 밥은 있어도 싫은 술은 없다는 ‘애주가’들의 흥얼거림.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음직한 그 노래가 생각난다. ‘남주북병(南酒北餠)’이 서울에서만 통하랴. 70년이 넘는 세월 전북의 최남단인 순창에서 자신만의 비법으로 맛있는 가양주를 담가온 어르신. 술이 무슨 맛이 있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대문만 들어서면 은은한 술 향기 퍼지는, 옛날식 사랑방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짚더미 위에서 암탉이 울어대는 곳. 이제 막 버스가 다니기 시작한 산골 작은 마을에서 술을 벗 삼아 살아가는 공정옥(89ㆍ인계 지산) 어르신 댁을 찾았다.

 

가을 햇살이 마루의 절반을 차지한 곳. 수화기 너머의 소리를 좇아 마을회관 뒤편의 시골집에 들어서자 점잖게 중절모를 쓴 어르신이 나오신다. “아 글시, 나는 한잔 묵으러 온다는 소린지 알았더니 취재? 기자여? 아이고, 다 늙어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른 디 무슨 취재여~! 술이나 한 잔 묵고 가”하시며 반긴다.

▲"맛이나 보라"며 창고 한켠에 고이 숨겨둔 술 장독대를 열고 술을 뜨는 모습. 그 향기를 사진으로 담을 수 없어 아쉽다.

미처 인사도 나누기 전에 술 가득 담긴 국 대접이 눈앞에 턱 놓인다. 창고 안 장독대 속에서 국자로 떠낸 맑은 술. 공정옥 어르신이 올 봄에 직접 담근 술이다. 연노란 빛에 향이 예술이다. 한약 향이 난다. 낮술은 어미, 애비도 못 알아본다는데…. 미처 고민할 새도 없이 그만 꿀떡 꿀떡 두 모금 넘기니 코끝이 찡하다. 맛있다. ‘술은 술~술 잘도 넘어간다는 노래가 이래서 나왔구나’ 싶다.
열두살 때부터 인계면 지산마을에 터를 잡고 살아왔다는 어르신은 마을에서도 알아주는 가양주(家釀酒) 달인이다. 칡ㆍ모과ㆍ은행 등 온갖 재료가 어르신의 손을 거치면 그윽한 향을 품은 건강주로 바뀐다. 애주가이지만 아무 술이나 마시지 않는 그는 자신만의 비법으로 매년 술을 담가왔다.
가양주는 집에서 담근 술을 말한다. 조선시대부터 각 지방마다, 그리고 집집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가양주를 담갔는데 중국이나 일본에서 차를 내어 손님을 맞듯 우리나라는 집에서 빚은 술을 내어 손님을 맞았기에 술은 언제나 집에 있어야 할 음식이었다. 그래서 술 담그는 일이 집안의 여인들에게는 김장김치를 담그는 일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술 빚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아 요즘은 가양주를 담는 집을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 공정욱 어르신은 지난해까지도 누룩과 고두밥에 약재 끓인 물을 넣고 치대어 전통 방식으로 술을 빚었다. 올해도 전통방식으로 술을 담고 싶었지만 기력이 약해져 소주를 이용했다고 한다. 어르신은 “약초 달여서 초물, 두물 떠서 고봉으로 쌀 두말을 밥을 해야 혀. 고두밥을 식히고 누룩하고 섞어서 약물이 적당히 식으면 잘 비벼야 제. 막 치대야 혀. 그러고 딱 덮어 두믄 저녁부터 어석어석 해지면서 버끔이 복작복작 나기 시작하지, 하~암!”하시며 “지대로 헐라믄 혼자는 못히여. 놉 얻어서 히야 제. 올해는 나 혼자 할 수 없어서 그냥 소주로 해서 담가 봤는디 전에만 못하고만”하고는 먼 산을 바라본다.
북적이던 집이 허전해지고 두 달 전에는 아내마저 떠나보냈다는 어르신은 “우리 집사람도 술 잘 마셨어.

술 꼬새도 없었지. 그 전에는 읍내 사는 전태오, 장판호 등 많이들 와서 술 얻어 묵고 갔지. 원래 손님보담 주인네가 더 많이 묵어야 쓰거든? 그래야 손님들도 편히 많이 묵고 그러는 법이여. 그래서 그때게는 참 많이도 처 묵었지 글시. 근디 인자는 죽어부렀는지 찾아오도 안 히여”라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내년이면 아흔인 어르신은 특별히 아픈 곳도 없다. “밥은 어쩌다 생각 날 때 한 번씩 먹고 술은 자다가도 마신다”는 그는 “배 아플 때도 약이고 머리 아플 때도 약이여. 아 그렇게 마셨어도 설사 한 번 없어. 이건 술보다 약”이라고 자신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한약재가 들어가 푹 삭히니 한약 향기에 맛도 효소와 같다. ‘나쁜 술 먹기가 정승하기보다 어렵다’고 아무리 술 좋아하는 술꾼이라도 변질된 나쁜 술은 먹을 수가 없듯 온도가 조금만 맞지 않아도 쉽게 변하는 전통주이기에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는 어르신의 술. 거기에 암탉이 방금 낳은 신선한 달걀까지 동동 띄워주시기까지.
조금만 더 마시고 올 걸… 아쉽다. 국 대접 가득 떠 주시는 향긋한 술, 그 술 맛보고 싶으면 누구나 염치불구하고 “어르신! 술맛 보고 싶어서 왔어요!”하며 찾아가시길. 넉넉한 인품으로 구성지게 전해주시는 구십년 세월 이야기에 귀가 즐겁고, 손때 묻은 물건과 직접 지으신 흙집에 눈이 즐겁고, 깊고 진한 술맛과 향에 입과 코가 즐거워져 돌아올 테니.                         
**남주북병(南酒北餠) : 예전에 서울 남촌(南村, 청계천 남쪽 동네)은 술맛이 좋고 북촌(北村, 청계천 북쪽 동네)은 떡맛이 좋다 하여 이르던 말.
**가양주(家釀酒) : 집에서 담근 술을 가리킨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가정에서 술을 빚어 마시는 풍습이 뿌리를 내려왔다. 술 접대가 예(禮)와 도리(道理)로 인식돼 미주(美酒)를 빚어 손님 접대와 제사, 차례 등의 가정 행사에 이용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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