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어머니 그리고 고추장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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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어머니 그리고 고추장계보
  • 홍승채 대표
  • 승인 2013.12.16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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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채(54) 대한민국 힐링수도 순창희망연대 대표

병상에 계시는 어머니를 뵙고 동생 집 문을 나설 때 마다 발걸음이 무겁다. 어머니를 생각할 때 마다 나는 죄인의 심정을 벗어 날 수가 없다. 벌써 일 년 이상을 누워계시고 있다. 정신은 초롱초롱 하시지만 육신의 거동이 힘드시니 오죽 마음이 아프실까. 그런 어머니의 심정을 모를 리 없는 나는 지금 내가하는 활동을 핑계 삼아 자주 찾아뵙지도 못하고 그저 마음으로 나의 사랑과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이런 마음마저 동생에게 의탁하고 있는 나는 필시 어머니의 마음에 자식으로서 제 자리를 잡지 못할 것 같다는 염려가 크다.
어머니를 회고하면 내가 대학 4학년 때 참으로 집안이 어려웠다. 정치에 대한 미련을 힘겹게 버렸던 아버님께서는 광주(光州)에서 조경업을 시작하셨는데 애초 사업에는 문외한이던 아버지였지만 그 시작은 운이 좋았던지 광주에서 제법 쏠쏠하게 사업이 잘되셨다. 그때 아버지의 작품이 오늘날 광주박물관의 조경 작품으로 남아있다. 그런대로 원만했던 아버지의 사업이 광주민주항쟁으로 통신 두절, 교통과 물류의 단절로 송금 등 일체의 경영에 필요한 거래가 멈추었고 초창기 사업이라서 이를 견디지 못한 아버지는 사업이 부도가 나고 설상가상으로 돈까지 맡았던 동업자가 서울로 도망을 가면서 아버님은 말 그대로 거덜이 나 버렸다.
이 여파에 밀린 이자 등으로 시달리던 우리 집안은 내가 대학 4학년 때 참으로 힘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하숙비와 등록금 일체를 보내주기조차 어려웠던 시절 어머니는 손에 놓았던 할머니의 사업을 다시 이어가시기로 작정하셨다. 바로 고추장제조 사업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이 동서화합을 명분으로 새롭게 만들어낸 88고속도로 즉 대구-광주 간 고속도로의 개통과 함께 관광객은 줄을 지었고 “국풍 80” 이라는 국가적 지원으로 어렵사리 시작한 어머니의 고추장 사업은 시의 적절하게도 그 규모를 달리하게 되는 전기를 맞이했다.
사실 그 시작이 그때 돈 20만원이었으니 규모라 할 것도 없었지만 당시 순창군 지정의 고추장제조명인 1호의 타이틀을 가지고 순창고추장보전협회를 조직하여 그 회장으로 어머니는 밤새는 줄 모르고 일하셨다.
나는 졸업 후 서울에 올라와 잡지사에서 일을 했고 민주화추진협의회에서 국제 국 교민부장으로 재임하며 생활하던 시기였다. 그때도 변함없는 어머니의 지원은 이어지고 있었으니 나는 사실 고추장으로 이어온 생활의 덤이었다. 서울에서도 고달픈 일상도 일상이지만 그만한 생활을 하는 것도 어머니의 뒷바라지가 없다면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한이 참 많으셨을 어머니! 그런 어머니에게서 보이는 모든 것을 인자함과 인내의 리더십으로 말하는 것에 무리가 없다.
서울의 정치활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성동에서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을 소위 “고추장계보”라 불렀다. 농반 진반이 별칭으로 굳혀졌고 고추장이라는 말만 나와도 나를 연상시키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려운 시절 동지들에게 변변한 선물 하나 돌려줄 수 없어 늘 어머니 신세지고 선물을 하곤 했던 고추장의 위력이 맛도 맛이지만 나의 머리에 훈장처럼 붙여진 것이었다. 벌써 십수년 지난 얘기지만 어머니의 칠순잔치를 모셔드린 자리였다. 참으로 많은 하객들이 참석하시어 과분한 축하를 해주셨다. 아들이라고는 달랑 나 혼자를 두고 참으로 가슴을 졸이고 사셨을 어머니를 위한 잔치에 참석해준 모든 분들의 한마디는 장한 어머니라는 칭찬의 말씀이었다.
이 장한 어머니를 나는 가장 존경한다. “순창고추장 제조명인 김경순여사 고희연” 이라는 잔치 현수막을 보시면서 “무슨 자랑이라고”하시며 수줍어하시던 어머니. 푸념처럼 늘 어머니는 말씀하시곤 한다.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애비 정치 뒷바라지마저 모자라 아들까지~” 그러면서도 “정치하는 사람은 돈을 못 번 게 내 손지들 까지는 내가 책임져야제” 하시는 말씀에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돌이켜보면 아버님께서는 36세에 전북 제2대 도의원을 하셨는데 그 이후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셨고 소위 체면과 관계되어서 돌아가실 때까지 직업을 가지신 적이 없다. 76세 되어 작고하실 때까지 물경 40년을 뒷바라지 하셨는데 신물이 날만도 하실 것이다. 우연인지 몰라도 아버님께서는 내가 시의원에 당선되기 3개월 전에 운명을 달리하셨으니까 정치인으로서 뒷바라지의 바통 터치를 어떻게 그리도 정확하게 할 수가 있었는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3개월 만에 정치인으로 거듭난 아들의 뒷바라지에서 지금까지 나를 큰 그림자로 도와주신다.
나의 아내도 마찬가지다. 92년도에 영국유학을 떠날 시점에 4대를 이어받은 고추장사업을 아내는 군말 없이 따라했다. 난장(亂場)의 장터에서 어머니가 만드신 고추장을 판매하면서 한겨울을 났다. 지금도 추위를 유난히도 싫어하는 나의 아내는 그때를 가장 서러웠다고 이야기하고는 한다.
그랬을 것이다. 나의 유학비용을 보태고 시의원으로 당선되어 2기 지방의회 때는 고추장 전문 가게를 경영하면서 월수입 60만원이 고작인 명예만 단단한 시의원 남편의 뒷바라지, 그리고 아이들의 학비를 도맡아 처리했으니 이 또한 고추장과 어머니 덕이었다. 아이들도 신세대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식성이 토속적이다. 어릴 적 할머니의 말씀이 “고치장을 묵어야 힘을 쓴당게”라는 충고가 귀에 익은 듯 고추장과 된장을 참으로 잘 먹는다. 칠순잔치에 참석하셨던 분들에게 한 개씩 선물로 드렸던 어머니가 손수 만드신 고추장 장아찌는 지금도 주위에 화젯거리다.
이쯤 되고 보면 “고추장” “고추장계보”라고 불리는 나의 별명과 조직의 별명쯤은 가문의 영광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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