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3건) 리스트형 웹진형 타일형 다시보는 우리역사(23)광개토태왕릉 비문 해독의 쟁점은 무엇인가 다시보는 우리역사(23)광개토태왕릉 비문 해독의 쟁점은 무엇인가 고구려 장수왕이 아버지 업적을 기리기 위해 414년에 압록강 중류 지안(국내성, 현재 중국 지린성)에 세운 광개토태왕릉비는 고구려 멸망 뒤 오래 동안 잊혀졌다. 국경 너머 이 지역을 간혹 왕래하던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 비를 과거 금나라 황제 유적쯤으로 여겼다. 능비 존재가 정식으로 청나라 조정에 보고된 것은 1880년 무렵 이 지역을 개간하던 농부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비문 전체를 판독해 고구려 광개토태왕 능비라는 사실을 최초로 밝힌 것은 일제가 한반도 침략을 노골화하던 시기에 일본 학자들이었다. 광개토태왕릉비는 오늘날 한ㆍ중ㆍ일 강연강좌 | 림재호 편집위원 | 2021-06-16 16:14 | 543호 다시보는 우리역사(22) 고구려 제19대 광개토태왕 다시보는 우리역사(22) 고구려 제19대 광개토태왕 고구려 제19대 광개토태왕(재위기간 391∼413년)은 한국역사상 전무후무한 정복군주로서 세종대왕과 더불어 한국인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왕이다. 공식 명칭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다. 따라서 줄여서 말하면 ‘광개토태왕’이 맞는 이름이다.고국양왕의 아들로, 16세에 왕위에 올라 39세에 사망했다. 이름은 담덕(談德)이고, 생존 때 칭호는 영락태왕이었다. 그가 사용한 영락(永樂)이라는 연호(한자문화권 군주국가에서 쓰던 년을 세거나 기록하는 방법)는 한국사 최초다. 광개토태왕 즉위 당시 대외정세는 매우 복잡했다. 서쪽으로는 후연 강연강좌 | 림재호 편집위원 | 2021-04-28 16:50 | 536호 다시보는 우리역사(5) 주몽 신화 ‘분석’ 고구려 시조 주몽에 관한 신화 기록은 여러 문헌에 나타난다. 그중에서도 고려 때 이규보가 지은 《동국이상국집》 은 지금은 전하지 않는 《구삼국사(舊三國史)》의 내용을 인용해 놓은 것이다. 해모수와 하백의 도술 대결, 주몽이 동부여를 탈출할 때 유화부인의 역할, 주몽과 비류국왕 송양의 대결 등 흥미로운 신화 소재를 폭넓게 갖추고 있다.다음은 주몽 신화의 내용 일부다.천제(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북부여 왕 해모수는 웅심연 물가에 놀러 나온 하백의 맏딸 유화(柳花)와 통정한다. 해모수는 하백에게 유화와의 혼인을 요청하고, 해모수 강연강좌 | 림재호 편집위원 | 2020-01-08 15:21 | 474호 처음처음1끝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