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서서(47)/ 시간의 가치
상태바
길위에서서(47)/ 시간의 가치
  • 선산곡
  • 승인 2019.02.14 09: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버스에서 내렸다. 그날따라 차가 밀려 입실시간이 임박해 있었다. 마지막 이수과목 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무언가가 허전해 확인해 보니 전화기가 없었다. 조금 전 타고 내린 버스에서 흘린 것이 분명했다. 버스를 따라잡기 위해 택시를 타야하나, 아니면 시험장에 들어가야 하나. 택시를 타고 버스를 따라 잡으면 전화기는 찾을 수 있을지 몰라도 시험은 치를 수 없게 된다. 시험을 치르지 못하면 그 학점을 따기 위해 다시 반년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길게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그대로 시험장에 들어섰다. 전화기는 쉽게 잊혀졌다. 과목이수를 위한 의식이 우선이어서 다행이었다. 시험을 무사히 치른 뒤 친구의 전화기를 빌려 제 전화번호를 눌렀다. 혹시나 운 좋으면 찾을지 모른다는 기대, 그러나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전화기는 그대로 잃어버렸지만 이후 ‘이유 있는 분실’에 크게 미련을 두지 않기로 했다. 명절 가족파티 때 아들이 한 이야기였다.
물론 대학 다닐 때의 에피소드지만 아들이 취한 행동은 현명했다고 생각했다. 스마트폰의 값어치가 그 무렵에 상당했겠지만 시간에 대한 가치를 바르게 판단했다는 것이 대견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한 뒤 잃은 한 쪽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는 결론을 나는 더 흡족해했다.
인터넷에 ‘렌디 포시’를 치면 미국의 저명한 교수의 이력이 뜬다. 카네기 멜론대 컴퓨터 공학과 교수. 2008년 7월 25일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암 선고를 받은 뒤 그가 마지막으로 강의했던 영상물이 당시에 큰 주목을 받았다. 물론 삶이 얼마 남지 않는 사람이 강의하는 비장함이 세인의 눈길을 끌기도 했겠지만 그 강의록을 정리한 책과  영상물은 아직도 인기가 있다. 강의의 주제는 아마도 삶의 가치였을 것이다.
그가 가게에서 물건을 산 후, 셀프계산대에서 금액 17달러의 카드결재를 두 번 하는 실수를 했다. 그 영수증을 하나를 취소하기 위해서는 15분의 시간이 소용된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17달러를 환불받기 위해 15분을 쓸 것인가 말 것인가. 결국 그는 17달러를 포기한 15분을 선택했다.
오래 전 나도 시간에 대한 허비(虛費)와 소비(消費)를 깊이 생각한 적이 있었다. 목표를 위해 쓰는 시간이 소비이고, 결과 없이 흘려버리는 시간은 허비라고 스스로 판단했다. 나에게 주어진 이 시간은 지금 소비인가 허비인가. 대단한 발견은 아니었지만 어떤 일의 틈바구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은 허비인 것이고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한 모색이라면 소비라는 생각을 앞세웠다. 물론 소비인지 허비인지 분간할 수 없는 착각 속에서 살아왔지만 실은 나 자신에 대한 합리화에 지나지 않았음도 알고 있다. 허비와 소비는 비슷한 말이다. 인생도 길게 보면 허비이며 소비일 뿐이다. 다만 주어진 상황에 대처하는, 순간의 판단이 어느 쪽 결과가 되느냐는 것뿐이다. 이 또한 가소로운 내 편견이지만.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랜디 포시처럼 15분 삶의 가치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는 15분의 가치를 위해 17달러를 포기했지만 또 다른 삶의 가치로 보면 15분을 들여 17달러를 되찾는 것이 올바르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실수는 자신이 되돌리는 것도 중요하다고 우리는 배워왔기 때문이다. 전화기는 아깝지만 분실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시간의 소중함으로 대처한 아들의 결정은 옳았다.
“잘했네.”
아들에게 내가 한 말이었고 약속한 듯 우리는 함께 잔을 들었다. 정월 초하룻날 밤이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금과초 100주년 기념식 ‘새로운 백년 기약’
  • 금과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식 4월 21일 개최
  • [순창 농부]농사짓고 요리하는 이경아 농부
  • “이러다 실내수영장 예약 운영 될라”
  • ‘카페 자연다울수록’ 꽃이 일상이 되는 세상
  • 순정축협 이사회 ‘조합장 해임 의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