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호 ‘동계 추동 방앗간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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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동계 추동 방앗간 주인
  • 김슬기 기자
  • 승인 2014.01.09 17: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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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70
그리운 40년전 방앗간

 

▲방앗간을 보여주며 쑥스러운 웃음을 지으신 김용호 어르신.

   뿌연 먼지가 앉은 곳. “도로로록 탁”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곳이 방앗간인가 싶다.
“기계가 돌아가기는 하는 건가요?”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올 가을에도 수수방아를 쪘다며 양동이에 담겨진 수수들을 보여주는 김용호(73) 어르신.
   겸연쩍게 머리를 긁적이다 케케묵은 40년 전 이야기를 여쭈기 시작했다. 세월 따라 함께 늙어온 방아기계를 보며 1970년대를 추억하는 시간. ‘응답하라…1970’

 

‘대동 20마력’ 방아기계

▲세월따라 녹이슬어 볼품 없어졌지만 수수 빻을 힘은 아직 남아있다.

동계면 추동마을 앞, 50년 전부터 그 자리를 지켜온 ‘추동방앗간’은 1970년대에는 문전성시를 이루던 곳이다. 쌀ㆍ보리방아를 찧어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약 10년 전부터는 수수 방아만 조금씩 찧고 있다고. 김용호 어르신은 “기계가 돌아가기는 해도 아무 때나 돌리간디. 내야 쑤시 빻음서 넘들이 맡겨 놓은 것들 같이 돌리고 그러기만 허제 다른 것은 못해. 시방 방애 찧는 큰 공장들이 얼매나 많은 디 요리 오겄어?”라며 “인자 없어져불믄 못 찍은게 사진이나 많이 찍어가” 하신다.
반백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김용호 어르신과 동고동락해온 추동방앗간의 방아기계는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한다. 천장을 통해 새어 들어오는 햇빛에, 어둠이 익숙해지자 작은 나무로 엮어 놓은 사다리, 큼지막한 수레바퀴와 벨트, 녹슨 지붕까지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어르신은 “그때 돈 700만원인가 800만원인가 주고 이 기계를 샀어. 대동 20마력. 속 한번 안 썩이고 고장 없이 이때까정 썼으니 고맙지”라며 기름때에 가려 보이지 않는 상표를 찾았다. 걸레로 몇 번을 닦고 나서야 한문으로 된 상표가 희미하게 드러났다.

 

한가마 찧으면 ‘만원’

어두워 앞이 잘 보이지도 않는 추동방앗간 안에는 온갖 살림살이가 가득했다. 방앗간 겸 창고로 쓰고 있기에 이것저것 집에서 쓰는 물건들을 쌓아 놓았다고.
김용호 어르신은 40년 전,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방앗간과 인연을 맺었다. 방아기계는 새로 샀지만 방앗간 건물은 원래 있었으니 반백년이 우스갯소리는 아니란다.
직접 수수 농사를 지어 수수방아를 찧을 때만 기계를 돌리는 통에 방앗간은 1년에 두세 번만 숨을 쉰다. 40킬로그램(kg) 한 가마 수수방아를 찧는 데 받는 돈은 만원. 주민들은 때를 기다렸다가 김용호 어르신이 본인의 수수를 수확해 방아 찧는 날을 맞춰 방앗간에 들른다.
한 번에 다 쪄서 나오는 신식 방아기계들이 많지만 ‘기계가 옛 것이기는 해도 맛이 다르다’는 생각에 꾸준히 이곳 추동방앗간을 찾는 단골도 있다. 김용호 어르신은 “우리 기계는 오래되어서 한 번에 못 빻아. 한 다섯 번은 돌려야 돼. 그래도 맛이 다르담서 사람들이 꼭 찾아와. 한 번에 쪄서 나오는 쑤시는 맛이 없다고. 나는 모르겄는디 여하튼 맛이 다르디야”

 

방앗간은 마을의 ‘한 조각’

▲버스 정류장에서 취재하는 것을 구경하시며 그 시절 이야기를 전해주신 (왼쪽부터)이상구, 장종한, 김형준 어르신.

수수방아를 찧으려는 마을 주민이나 오래된 방앗간의 모습을 담으려는 전국의 사진작가들만이 가끔씩 찾는 곳이 되어 버렸다는 추동방앗간은 추동마을 어르신들에게는 마을의 일부로 생각되는 곳이다.
취재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회관에서 나와 버스 정류장 의자에서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김형준(90) 어르신은 “지금 이 사람 오기 전에는 이석근ㆍ장종환이가 같이 했지. 구미에서 뜯어 와서 지은 뒤로 그대로여. 옛날에는 여그서 방아 다 쪘어”라며 지난 시절을 떠올렸다.
“나 군대갈 적에 형님이 방앗간을 했으니 한 50년은 되았지”라던 장종한(76) 어르신은 “서울서도 오고 광주서도 오고 어디서 온지 알 수도 없는디 많이들 와서 사진도 찍어가고 그래. 인자는 저렇게 볼품없이 되어 부렀지만 그래도 골동품 맹키로 쓸 데가 있는가벼”라고 말했다. 이어 “저것만 보면 두 가지 맴이 들지. 녹도 슬고 인자는 쓸모도 없응게 없애부렀으면 허다가도 옛날 것, 그 때 것이라 없으믄 보고잘 것 같고 아깝고 그런당게”라며 마을, 그리고 방앗간과 함께 부대껴온 세월을 돌아봤다.

 

막걸리 한 사발 헐라믄 와

1970년, 참새가 방앗간 들르듯 사람도 수없이 방앗간을 들르던 시대는 갔다. 오가는 이들이 없으니 철문으로 된 입구는 굳게 잠긴 채 그대로다.
바로 옆 김용호 어르신의 집을 통해 들어가는 문으로 방앗간에 오는 주민들이 아직은 몇몇 남아 있지만 이마저도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른다. 어르신들의 주름 따라 방앗간도 녹이 슬고, 이곳저곳 아픈 데만 늘어가는 사람 따라 방앗간도 세월의 무게를 견디고 있다.
노인과 방앗간. 총총거리며 방앗간을 사진에 담는 동안 찬바람 맞으며 끝까지 함께였다.
“사진 다 찍으믄 막걸리 한 사발 허게 회관으로 가잉!”, “어디서 왔는가”, “그리여? 풍산 허믄 내가 또 잘 알제, 강인형이 동네 아니여?”라며 쉼 없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는 어르신들.
방앗간이 40년 됐다, 아니다 50년 됐다 네 나이를 생각해 보라는 등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그리울 추동마을의 한 ‘추억’이 될 것이다. 언젠가는 ‘응답하라 2014’를 외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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