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편지(2)/ 오하두흐, 주민을 모조리 없애버린 학살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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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편지(2)/ 오하두흐, 주민을 모조리 없애버린 학살 현장
  • 조남훈 객원기자
  • 승인 2015.01.16 14: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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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에서 보낸 두번째 편지

조남훈 객원기자가 떠났다. 강원도에서 순창으로 바람따라 내려오더니 이젠 프랑스 '파리'로 갔단다.
파리에서 그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무엇일까. <열린순창>은 그가 파리에서 겪는 타국생활 이야기를 연재한다. 두번째 편지는 '무작정 떠났던 홀가분함이 사라진 오하두흐 이야기.  <편집자>

주민 700명 가운데 단 10명 살아남아
전쟁ㆍ나치 참상 기억하려고 현장보존
승리자가 쓴 전쟁… 이면의 아픔 있다

 

보름 여 파리에 머무는 기간, 가급적 큰길보다 골목을 다녔고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았다. 외국인 가운데서도 동양인을 볼 기회가 거의 없는 소도시에서는 지나가는 운전자도 고개 돌려 쳐다보는 때가 많았다. 어린이들은 두 부류다. 몇 번이고 고개를 돌려보거나 아예 피하는 경우. 필자가 먼저 봉주르(bonjour)하며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고 나서야 그들의 미소를 볼 수 있었다.
프랑스의 겨울은 해가 짧고 우중충한 날씨가 계속 된다. 한국보다 위도가 10도나 높은데도 기온은 훨씬 높다. 눈 대신 안개비가 자주 내리고 어둠이 일찍 깔린다. 무려 2시간의 기나긴 점심시간이 끝나고 두 시간여 지나면 일과를 마치는 게 보통이어서 계획한 일정을 끝내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 서둘러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현지 지리에 밝지 않은데다 원거리 여행일정의 연속이어서 숙소에 도착하면 새벽이 되곤 했다.
새해 첫 날, 첫 방문지는 오하두흐. 가는 길은 여행길이었지만 오는 길은 여행길이 될 수 없었다. 이곳은 한국으로 말하자면 영동군 노근리 양민 학살지 같은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는 곳이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7월 6일. 나치는 프랑스 중부의 한 마을을 잿더미로 만든다. 주민을 학살했고 건물은 남김없이 불을 질렀다. 모든 집을 뒤지며 사람을 끌어낸 후 남성은 광장에 모아놓고 총격을 가했고 여성과 어린이는 성당에 가두고 불을 질렀다. 탈출하는 사람에게는 기관총을 난사했다. 성당 안에 달려있던 종이 열기에 녹아 떨어졌다. 무려 700여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오하두흐에는 프랑스나 연합군 중 어느 누구도 들어와 있지 않았다. 주민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단 10명. 외지에 나갔다가 화를 면한 8명과 성당 안에 갇혔다가 부녀자의 도움으로 간신히 쇠창살 틈을 빠져나와 숨었던 어린이 2명이었다. 마을은 이미 1차 세계대전 때도 주민 100여명이 희생된 바 있다.
전쟁 후 엄청난 학살 현장을 방문한 샤를드 드골 프랑스 대통령은 마을을 재건하지 않고 그대로 놔두기로 결정했다. 전쟁 참상을 있는 그대로 알리며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육 목적이었다. 추모비 앞에는 성당에서 불에 타 하얗게 변한 유골을 수습해 모아둔 관이 있다. 차마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마을 옆 공동묘지에는 희생자 가족들의 사진, 이름과 생년월일 등 간단한 신원을 적은 자료들이 있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나치의 패망 후 전범재판에서 오하두흐 학살 범죄자들은 상부의 지시에 의해 이뤄진 일이라며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고 한다. 파리의 센강이 피로 물들 정도로 나치 부역자 색출에 노력했던 프랑스에서 실제로 생긴 일이다. 희생자를 기릴 후손이 거의 없는 것도 모자라 범인 처벌에 실패했다는 점이 희생자 공동묘지를 더욱 슬프게 하고 있다. 
오하두흐 인근 지역은 공산당원이 꽤 많은 편이다. 나치에 대항해 싸우던 프랑스 공산당에 대한 기억과 학살을 접한 주민들의 의식이 지금까지 굳건한 공산당 지지로 이어지고 있다. 기적적으로 생존한 어린이도 성장해 공산당원이 됐다. 그 중 한 명은 새로 조성된 길 옆 마을에 살며 지금도 참상을 증언하고 있다. 파리에서 4시간 여 떨어진 이곳에는 예상 외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다.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전쟁의 상흔을 기억하려는 노력들은 서로 다른 형태로 많은 지역에서 시도된다. 다만 전쟁의 기록은 승리자의 관점에서 쓰이기 때문에 힘의 논리에 의해 사건은 부각되기도, 잊히기도 한다. 오하두흐 학살은 기억되지만 최소 10만명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됐다는 드레스덴 폭격은 독일에서조차 언급이 적다. 당시 드레스덴이 나치의 주요 군수기지였고 독일이 패망했다는 사실이 연합군(영국군)에 의한 학살에 대해 적극적 언급을 망설이게 한다. 학살을 언급하는 것이 자칫 나치를 옹호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자신들의 잘못을 들춰내는 것이 두려워 학살을 언급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 아니, 그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으니 한국의 현실이다. 증언이 있고 땅을 파면 유골이 나오고 학살이 공개되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니 정작 가해자는 무리 속으로 숨었고 이제는 진상규명도 못하게 됐다. 필자는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가운데 적어도 수십만 명이 뚜렷하지 않은 이유로 학살됐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학살들을 정당했다고 포장해야 자신이 살아남는 사람들이 남았고 그 잘못이 공개될까 두려운 자들은 애써 이 학살들을 외면하고 사회 권력을 휘어잡고 있다. 전쟁은 물론 보도연맹과 서북청년단, 제주 4ㆍ3항쟁, 5ㆍ18까지… 계보를 언급하는 것이 이처럼 싫어진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오하두흐를 만나고 무작정 떠났던 홀가분함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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