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명품] 순창한지는 상화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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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명품] 순창한지는 상화지였다!
  • 조남훈 기자
  • 승인 2015.04.07 1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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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 내린 듯 윤이 나고 질긴

 

▲한지박물관에 전시된 한지 만드는 틀

순창장, 남부지방 큰 닥 시장으로 유명세
10년 전까지 닥 거래했지만 지금은 끊겨
한지공장 운영했던 강희철 씨가 산 증인

 

주거 형태의 현대화와 인쇄 기술의 발달로 우리가 쓰는 종이는 불과 30년 사이 급격히 변했다. 한지가 사라지고 펄프지가 그 자리를 꿰찬 요즘, 한지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다. 먹을 것 부족한 시절 농촌 사람들이 한지에 의지해 겨울을 보냈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있고, 중요한 역사의 한 부분이기에 그 흔적을 찾아봤다. 
‘순창한지’라는 단어를 기자가 접한 것은 한지장 장용훈 씨가 얘기한 어느 자료에서였다. 한지 수요가 꾸준할 때 순창 지역의 닥 시장이 크게 서서 남부지방 보부상들이 순창에 모여들었다는 얘기였다. 완제품은 전주(완주)한지가 유명하였겠지만 그 재료인 닥나무는 군 지역에서도 많이 났기에 닥 시장이 큰 것으로 추측된다.
구전으로 전해지는 순창한지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재래시장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한 어르신은 “지금의 시장고깃간 근처에서 닥나무 거래가 많았다. 음력 추석 무렵이면 풍산 월명 사람들이 많이 나오곤 했다. 지금은 광주에 사는 이내성 씨가 유명한 도방꾼(도매상)이었다. 각지에서 종이를 도매로 떼고 닥채로 떼어 서울로 올려 보내는데 풍산 월명의 이 씨들이 집안간인 이 사람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전했다. 재래시장에서는 불과 십년 전 까지만 해도 닥나무가 거래됐었다고 한다.
이 같은 설명은 다른 사람에게서도 들을 수 있었다. 강희철(81ㆍ구림 안심) 씨는 직접 한지공장을 운영한 적이 있는 순창한지의 산 증인이다. 그는 한지 공방을 만들면 직접 자신과 함께 일했던 사람들을 불러 종이를 만들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강씨는 “안정리가 옛날에는 닥 팔아 밥 먹고 살았던 곳이다. 순창에서 식량 팔러 올 정도로 부촌이었다. 농작물로는 한 때 밖에 못 먹고 한지공장만 10군데가 있었다. 피닥 100근을 한 척이라 하는데 이는 아주머니 4명이 붙어서 벗겨야 하는 양이다. 공장마다 평군 4척을 했으니 그 양이 무척 많았다. 나는 하루 60권, 1200장을 떴다. 종이를 뜨는 사람이 있으면 말리는 사람도 있어야 하니 인력 수요도 꽤 있었다. 안시내(안심마을)는 물론이고 임실 일중리 물우리, 정읍 산내까지도 전부 닥으로 먹고 살았다”고 전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이 지역 주민들은 닥으로 겨울을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닥 껍질을 벗겨 한지공장에 주면 임금이 들어오고 남은 속대는 훌륭한 땔감이 되니 주민으로서도 이만한 벌이가 없었다. 강씨는 “섬유가 엉켜있는 한지는 공기가 통할 수 있어 환기효과도 있다. 나는 장판지를 주로 했다. 장판지는 한지를 여러 겹 겹쳐 두드리는 도침 작업을 해야 한다. 들기름을 먹여서 하면 수명이 길고 수리하기에도 편하다. 글씨를 쓰는 사람은 장지를 썼다”고 말했다.
순창한지의 품질은 기대 이상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한지는 지역과 특징에 따라 여러 이름이 붙는데 이 가운데 상화지(霜華紙)라 하여 군 지역에서 생산되는 한지를 일컫는 말도 있다. 서리가 내린 것처럼 윤이 나고 질겨 상화지라는 말이 붙었는데 고급한지로 쓰였다고 한다. 한지의 품질이 좋다는 것은 곧 피닥(닥나무 껍질) 품질이 좋다는 말도 된다. 강씨는 “물 좋은 곳에 한지공장이 있다. 회문산에서 내려오는 물은 오염원이 없으니 여기에 한지공장이 들어선거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도 산림조합이 있었다. 닥나무 품질은 ‘송, 죽, 매’로 등급을 매기는데 매가 하급에 해당한다. 이 지역 닥나무는 관리 통제품이 돼 함부로 반출할 수 없었다”고 전했다. 품질 좋은 닥나무가 많았다는 것이다.
순창한지의 명성은 다른 지역과 비교해 손색없는 수준을 보여줬다. 이 같은 평가에는 한지상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강씨는 “내가 위탁 판매할 때만 해도 전주, 함양, 광주 등에서 한지 장사를 크게 하는 사람들이 봄이면 한 차씩 사가고 아주머니들에게는 외상도 준 적이 있다. 한지는 여름이면 값이 뛰기 때문에 물건을 잡아두고 있으면 은행에서 돈 빌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한지 도매상이던 할아버지께서 1년 동안 번 돈이 김제의 만석꾼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고 한다. 회갑 기념으로 구림면 주민 전체 재산세를 대납해줘 면민들이 공적비를 세워주기도 했다”고 전했다.
한지공장은 이제는 전국에서도 보기 힘든 명물이 돼 가고 있다. 전주 한옥마을에 일부 사람들이 한지 공예품을 판매하고 있지만 한지 제작과정은 완주에서나 볼 수 있다. 한지공장이 문을 닫은 원인은 여러 가지다. 우선 사람들의 주거형태가 아파트 중심으로 바뀌면서 한지 수요가 점차 줄었고 값싼 펄프지와 중국산 닥이 수입되어 한지가 있던 자리를 꿰찼다. 반면 노동집약적인 제조 특성상 인건비 지출은 피할 수 없다. 닥나무를 직접 재배하는 곳은 사정이 덜 하지만 사서 쓰는 한지공장은 재료비 또한 만만치 않기에 종이 가격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받을 수밖에 없다. 닥을 삶을 때 쓰는 양잿물이 환경오염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해야 하는 폐수 정화시설 설치비용은 만만치 않다. 모두 종이를 계속 뜨기에는 가혹한 요인들이다. 순창한지 또한 이런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재래시장 노인의 말처럼 순창에서 마지막 닥 시장이 끊긴지도 10년이 됐다. 이제 순창한지의 역사는 구전으로만 전해진다. 지금은 강 씨 같은 한지 전문가가 아니라면 한지를 얘기하는 사람을 찾기마저 쉽지 않다. 만들 사람이 없는데 상화지, 혹은 순창한지의 명성을 되찾자는 얘기는 무의미하겠다. 하지만 군 역사의 한 부분으로서 기록되고 기억돼야 할 가치는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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