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6ㆍ10 민주항쟁 …“호헌철폐”, “독재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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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6ㆍ10 민주항쟁 …“호헌철폐”, “독재타도”
  • 조남훈 기자
  • 승인 2015.06.10 09: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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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철이를 살려내라, 한열이를 살려내라” 그날 함성…시민 역사적 의의 되새겨야

 

 

크게 울어라
詩 박노해

 


울어야 산다
태어나서 우는 놈만이 산다
울지 않으면 죽음이다

울어라
배고프면 울고 서러우면 울고
짓밟히면 울고 일자리 없으면 울어라

삶이여 울어라
한번은 제대로 울어야 한다
뼛속까지 깊은 슬픔으로 울어야 한다

갓 태어난 아이처럼
크게, 더 크게, 쩌렁쩌렁,
울부짖고 분노하고 저항하라
거품이 가시고 탐욕이 씻기고
맑은 슬픔의 힘이 차오를 때까지

살아 있다는 건 운다는 것
살아 있다는 건 절규한다는 것이다

비판만 하지 말고 대안을 제시하라고?
그것은 바로 너의 임무이다
다양한 대안과 희망을 독점하고
대안이 뭐냐고 윽박지르는 그것이 폭력이다

삶이여 울어라
한 번은 제대로 울어라
너의 슬픔을 넘어 모두의 슬픔으로
이 땅의 숨은 슬픔이 다 터져 나오도록
세계에 울리도록 우렁차게 울어라

성난 얼굴들이 햇살 아래 나설 때까지
슬픈 얼굴들이 햇살 아래 빛날 때까지

 

 

1979년 10월 26일부터 이듬해 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치가 내려진 1980년 5월 17일 까지를 ‘서울의 봄’이라 부른다. 이 시기에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수많은 시위들이 벌어졌다. 무늬만 대통령이었던 최규하는 민중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했다. 긴급조치를 해제했고 재야인사들이 복권됐으며 계엄령 해제와 유신헌법 개정을 위한 논의도 진행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서울의 봄’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실상 ‘식물대통령’ 뒤에서 정권 찬탈 작업들을 해오던 전두환은 5ㆍ18 광주항쟁을 탱크를 동원하고 총기를 사용하는 잔혹한 방법으로 제압했다. 그해 6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에 오른 전두환은 8월 5일 대장 진급, 22일 예편,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선 대통령이 되고, 1981년 1월 민주정의당 창당 총재가 되어 2월 개정된 새헌법에 따라 제12대 대통령이 되었다.
전두환은 재임기간 내내 ‘군부독재’라는 비판을 받았다. 6월 항쟁은 1987년 2월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이 그 도화선이다. 당시 서울대 재학생이던 박종철 열사는 학교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활동하던 박종운의 행방을 쫓던 경찰에 의해 연행됐다. 선배의 소재를 밝히지 않은 박종철은 경찰의 폭행과 고문에 의해 살해당했다. 당시 정부는 사망경위를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고 발표, 전 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정작 박종철이 끝까지 함구하며 지켜주고자 했던 박종운은 한나라당에 입당, 부천시 오정구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하며 변절했음을 확실히 보여줬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추운 겨울 민주화운동에 불씨가 됐다. 박종철 범국민추도식이 열린데 이어 그해 3월 3일에는 49재를 맞아 고문추방 국민대행진이 벌어졌다. 이후에도 끊임없이 박종철 진상규명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들이 벌어지며 분위기가 고조됐다. 전두환은 개헌요구를 거부하고 4ㆍ13 호헌조치를 발표했지만 종교계를 포함한 시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김승현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축소, 은폐를 폭로하자 민주화 요구 시위는 들불처럼 번졌다. 이어 6월 9일, 서울 연세대 앞에서 시위를 하던 이한열 열사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고 쓰러져 한 달 여 사경을 헤매다 사망했다. 이한열 열사가 피를 흘린 채 한 대학생에게 부축된 사진은 전두환 정권의 폭력성을 상징하는 산 증표였다.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진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에는 서울에서만 100만명이 넘는 시민이 모였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에 이은 이한열 열사 사망사건은 6월 항쟁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게 된 계기가 됐다. 1987년 6월, 한 달 동안 전국에서 집회에 참가한 사람은 500만명이 넘었다. 정장을 입은 채 시위에 참가한 사무직 노동자들이 늘어나면서 ‘넥타이부대’라는 신조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호헌 철폐’,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이어지면서 민정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는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했다. 이로서 대통령을 뽑는 체육관선거가 막을 내리고 보통 국민의 투표를 통해 선출하는 ‘직선제 5년 단임’으로 대표되는 지금의 대통령 선거제도가 생겼다.
김영삼 김대중, 양김의 분열로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빛을 바랬지만, 6월 항쟁은 시민들의 높은 민주화 의식이 무력으로 집권한 정권을 끌어내린 첫 사례로 남는다. 4ㆍ19, 5ㆍ18, 6ㆍ10 민주항쟁까지 한국사회의 주요 전환점이 된 사건에는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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