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있다…나라를 지킨 이들의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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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있다…나라를 지킨 이들의 사연
  • 조남훈 기자
  • 승인 2015.07.08 09: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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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흥면 봉덕…전사자 유해발굴 현장, 진척 더뎌도 끝까지 포기할 수 없어

▲복흥면 봉덕리와 정읍시 상교동의 경계가 되는 내장산 순창새제 인근에서 6ㆍ25 전사자 유해발굴을 하고 있는 군인들.
복흥면 봉덕리와 정읍시 상교동의 경계가 되는 내장산 순창새제 인근에 최근 군인 40여명이 각종 장비를 들고 올라왔다. 65년 전, 이곳에서 전투가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정보도 찾아냈다. 전투기록이 있으니 전사자가 있었을 것이나 누가 얼마나 죽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 중에는 국군도 있을 것이고 인민군이나 중국군의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했다. 아직 수습되지 않은 유해를 찾기 위해 산길을 뚫고 온 장병들은 가쁜 숨도 다 못 뱉고 발굴 작업을 시작했다.
이미 이곳에서는 몇 점의 유품이 발견된 상태였다. 카빈 소총과 기관총, 권총에 쓰이는 탄알이 여러 개 발견됐다. 숟가락과 칫솔을 비롯해 총기를 손질할 때 쓰는 기름통과 잉크병, 약병 등 개인용품이 나왔고 전투화 밑창도 발견됐다. 전투화 밑창은 국가별로 문양이 다르다. 그래서 국군과 인민군, 미군의 물건 중 누구의 것인지 확인하는 지표가 된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장에서 발견된 전투화는 문양이 닳아서 식별할 수가 없었다.
6ㆍ25 전사자 유해발굴은 예상보다 굉장히 성과가 적다. 전투기록과 유품이 나왔다고 해서 유해가 반드시 나오는 것은 아니다. 내장산 일대에서는 전면전이 일어나지는 않았고 시신도 수습 못할 정도로 바쁘지는 않아 누군가는 사후 수습을 했을 거란 추측도 있다.
안순찬 발굴팀장(원사)은 “구덩이를 200개 이상 파야 한 구가 나올까 말까다. 유해는 동료가 나중에 수습했을 수도 있다. 우리나라 정서상 시신은 보통 땅에 묻지 않나. 호 안에 있는 유해를 옮겨 양지 바른 곳에 묻어주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동물에 의해 훼손되는 경우가 많다. 토끼가 이갈이를 하느라 유골을 갉으면 나중에 찾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유해발굴단은 전국을 다니는 국방부 소속 감식단과 발굴 지역 인근에 있는 부대의 지원 병력으로 구성된다. 감식단 요원이 미리 찍어둔 곳을 지원 병력이 굴토를 하고 유해 일부가 발견되면 즉시 작업이 중단된다. 그 이후에는 감식단이 수습을 한다. 드문 경우지만 불발된 포탄이 나와 위험한 경우도 있다. 이때는 전문훈련을 받은 폭발물 처리반이 와서 수습한다.
장병들은 유품 몇 점을 토대로 순창군과 정읍시를 가르는 그 경계 능선을 열심히 팠다. 이미 교통호 50미터(m)와 개인호 50개 이상을 팠고 교통호 인근을 전면굴토하기로 했다. 전면굴토는 선과 지점이 아닌, 면의 개념으로 땅을 파는 것이다. 지난해에는 민간인 유해 2구가 발견됐다. 예상 외로 유해가 나오지 않자 최성영 35사단 정읍대대장은 효율과 사기를 높이기 위해 휴가증을 내걸었다. 유해를 발견한 장병은 포상휴가를 받을 수 있다. 포상정책은 민간인도 받을 수 있다. 전사자 유해 추정장소를 제보해 실제로 유해가 나오면 국군과 미군은 20만원~70만원, 인민군과 중국군은 숫자에 상관없이 20만원이 지급된다. 제보지 안내를 위해 동행할 때도 여비가 지급된다.
전사자 유해를 수습하면 가족을 찾아주는 일이 남아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전쟁이 시작된 후에야 인식표가 주어졌기 때문에 이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사람들의 유해 발굴 소식을 가족에게 전하기까지는 매우 힘들다고 한다. 안 팀장은 “국군은 인식표가 늦게 나왔고 참전 전에 신원을 확실히 기록해두지 않아 전사자 가족을 찾아주기가 어렵다. 하지만 미군은 그런 준비가 잘 돼 있어 유해를 찾으면 가족을 찾아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추가로 작업을 진행할 곳이 있는지 물으니 안 팀장은 지도를 보여줬다. 내장산 일대의 발굴 예정지가 여러 곳 적혀있었다. 지도에서 추가로 발굴이 요구되는 장소를 알려주니 현지 사람들의 이런 제보가 정말 중요하다며 고마워했다. 기자는 군 복무 시절 평창 지역의 전사자 유해발굴 작전에 참가한 적이 있다. 군에 와서는 언젠가 군내에서도 유해발굴이 진행될 거라는 생각에 틈틈이 주민들에게 물어가며 전투가 치열했던 곳을 조사해둔 터였다. 한 사람이라도 가족 품에 돌아갈 수 있도록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라를 지킨다는 신념으로 가족 품을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사연은 유해가 수습되어도 이곳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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