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규 인천순창향우회장
상태바
김용규 인천순창향우회장
  • 고윤석 향우기자
  • 승인 2015.08.26 09: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등 건곡 출신

 

▲김용규 인천순창향우회장과 아내 서순이 씨.

15살 소년가장 … 50년 역경 딛고선 ‘열혈 향우’
불우청소년 선도ㆍ색소폰 연주 재능기부 ‘보람’

 

김용규(60ㆍ유등 건곡 출신) 인천순창향우회장이 지난 20일(목) 오후 6시, 인천광역시 남동구 간석동 소재 인천호남향우회 향우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제52차 정기총회장에서 호남향우회 발전과 화합 증진 공로로 전국호남향우회연합회(총회장 이용훈)로 부터 ‘공로상’을 수상했다. 김용규 회장은 “제2의 고향인 인천에서 살아온 50년 세월을 돌이켜보니 크게 기여한 일도 없는데 이렇게 과분한 상을 주신 것은 앞으로도 향우가족들과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더 분발 하라는 격려로 알고 더욱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수상소감을 전했다.

환갑 맞은 김용규 회장

유등면 건곡리에서 가난한 농부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나 1966년, 순창옥천초등학교 5학년을 다니다 부모님을 따라 낯설고 물 설은 인천으로 이사를 왔다. 가난했던 형편이라 당장 식구들의 호구지책이라도 해야겠다고 작정한 아버지는 무작정 팔을 걷고 나섰다. 하지만 어려웠던 시절이라 취직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나 마찬가지였고 전라도 출신이라는 냉대 속에 다섯 식구의 가혹한 타향살이는 녹록치 않았다. 아버지는 열악하지만 인천항 부두용역 대행회사에 취직이 되어 먹고 살기위해 3년여 일하던 어느 날 사고를 당했다. 당시 중학교 2학년이던 김용규 회장은 하루아침에 팔이 불구가 된 아버지를 대신해 어린 두 동생을 건사해야만 할 가장이 되었다. 꼭두새벽부터 신문팔이며 온갖 일을 닥치는 대로 해온 어린 장남은 눈앞이 캄캄했다.

15세 어린나이에 가장이 되다

“비록 가난하게 살더라도 착하고 정직하게 살아야한다”는 아버지 말씀을 늘 상기하며 가난한 설움과 괄시에서 벋어나기 위해 낮에는 공장이나 채석장에서 잔심부름 등을 해 푼돈을 벌었다. 배우지 못해 서러움이 컸던 부모님을 보며 어떻게 하든지 나와 동생들은 공부는 해야 된다는 각오를 다지면서 동생들을 선도하고 가르치며 야간고등학교를 어렵게 마쳤다. 군 생활동안 부모님과 동생들의 걱정으로 번민한 끝에 확실한 기술을 하나라도 가져야 살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꼈고 재대 후 머뭇거릴 여유조차 없이 곧바로 태권도며 유도를 배워 체력단련은 물론 용접기술과 전기기술 등 취업을 위한 준비를 틈틈이 해왔다. 드디어 1979년 초, 제일제당에 입사를 하게 되었고 목표는 하루라도 빨리 셋방살이를 면하는 것과 동생들을 공부시켜 남부럽지 않은 반듯한 가정을 이루겠다는 목표로 열심히 근무한 결과 1년 만에 모범사원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했던가? 이제부터라도 부모님을 잘 모시려고 했지만 어머니는 홀연히 세상을 떠나셨고 입사한 지 4년여 만에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는 일생일대의 행운이 찾아왔다. 지인의 소개로 넉넉한 집안의 강원도 아가씨를 만났는데 첫 눈에 쏙 들었다. 하지만 “전라도 출신에 집안 형편도 여의치 않은데다가 장애인 아버지를 둔 장남이라고? 결혼은 절대로 안 된다”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적극적으로 교제를 했고 결국은 당사자들이 서로 좋아서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결혼하고 집안 안정이 찾아오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써 부모님을 모시고, 두 동생을 챙기기 위해 아내와 함께 불철주야로 땀 흘리며 열심히 일을 했고 이를 지켜보던 처갓집에서도 보는 시선이 날로달로 좋아지면서 급기야는 “우리 사위가 최고야”라는 격려와 성원을 받으니 용기가 백배 천배로 충전되었다. 일상 바쁜 생활이지만 회사에서나 가정에 소홀함이 없도록 갖은 노력을 다한 끝에 차츰 여유를 찾게 되었다. 근무하던 회사에서는 간부사원으로 회사의 발전을 위한 연구와 노력으로 기여한바가 크다고 상도 받고, 어려서부터 워낙 운동을 좋아한데다 100킬로그램이 넘는 당당한 체구를 가졌기에 안 해 본 운동이 없을 정도였다. 특히 몸의 근육을 극대화하여 멋진 몸을 가꾸는 운동인 보디빌딩(Bodybuilding) 인천대표로 전국대회에 출전하여 입상한 전문 보디빌더이기도하다. 또한 2003년 가을, 평소 소원하던 체육관(인천 계산동)을 개관하고 직접 운영하기 위해 지난 23년 동안 근무했던 제일제당을 아쉽지만 퇴직할 수밖에 없었다. 퇴직후 사업은 물론 색소폰 연주 등 취미활동과 적극적인 향우회 활동을 시작했다.

제2의 고향, 인천 50년 역경의 세월

제2의 고향인 인천에서 지난 50년 동안을 부모님을 대신해 두 남동생과 아들딸을 훌륭하게 공부시켜 시집 장가도 잘 보냈고, 돈도 벌어 자가 건물도 마련하는 등 가난을 훌훌 털어내고 반듯한 일가를 이뤘다. 현재 전국생활체육보디빌딩연합회 부회장과 한국관악문화예술원 인천지부 사무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인천순창향우회의 초창기 박광원ㆍ조계수 회장 시절부터 향우가족들의 친목과 애경사를 위해 각별하게 물심양면으로 격려했고, 사무총장을 2회 역임했다. 배고팠던 시절을 회상하며 가족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불우청소년들의 선도를 위해 체육관 이용 편의 도모와 향우회 행사장 등에서 색소폰 연주 재능기부를 하는 등 이웃을 보듬으며 열심히 봉사하는 열혈 향우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금과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식 4월 21일 개최
  • [순창 농부]농사짓고 요리하는 이경아 농부
  • 우영자-피터 오-풍산초 학생들 이색 미술 수업
  • “이러다 실내수영장 예약 운영 될라”
  • [열린순창 보도 후]'6시 내고향', '아침마당' 출연
  • 재경순창군향우회 총무단 정기총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