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철부지 귀농 신혼부부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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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철부지 귀농 신혼부부의 이야기
  • 전명란 독자
  • 승인 2015.08.26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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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회 영농ㆍ생활수기 우수작 일반부분
전명란(42ㆍ풍산 대가)

남편의 고향으로 귀농해 미나리 농장을 일구는 전명란(42ㆍ풍산면 대가)씨의 사연이 농민신문 생활수기 공모전에서 우수작에 선정됐다. 전씨는 귀농 후 힘들고 기뻤던 삶을 되돌아보며 후배 귀농인에게 귀감이 될 만한 사연들을 글로 풀어냈다. <열린순창>은 전 씨의 동의를 구해 그의 글을 게재한다.    <편집자>

 

외환위기 남편 실직…꽃가게 3개월만 ‘폐업’
대책 없이 첫째 딸 데리고 남편 고향 ‘선택’
빚 늘자 이것 저것 심고 키우고 실농 ‘연속’
상습침수지역에서  미나리를 만난 건 ‘운명’
정성 드려 빚은 미나리발효음료 매출 ‘신장’
식물터널ㆍ교육장 조성, 6차산업예비 ‘인증’

저는 남편과 딸 셋, 아들 둘의 자녀를 두고 전형적인 농촌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농사일하랴 자녀 키우랴 하루하루 정신없이 보내고 있지만 그동안의 삶을 되돌아보고 훗날 아이들에게 가족이 살아온 과정을 알려주고자 어렵게 펜을 들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1998년 12월에 결혼했습니다.
원래 건축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때마침 불어닥친 아이엠에프(IMF)로 직장생활을 포기하고 전업주부가 됐습니다. 그즈음 남편도 오래 다닌 직장을 그만두게 됐습니다. 철없는 신혼부부였던 우리는 세상 돌아가는 물정도 모르고 꽃집을 차렸습니다. 그러나 꽃이 좋다고 꽃집을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꽃집은 장사 수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결국 3개월 만에 문을 닫고 이사를 3번 다니다 “우리 시골 가서 살까?” “그럴까?” “그래, 가자!” 하며 농촌행을 택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대책도 없고 무식한 철부지들의 판단이었지요.
1999년 11월, 10개월 된 첫딸을 데리고 남편이 나고 자란 전북 순창군 풍산면 대가마을에서 귀농 신혼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산에 풍란 캐러 다니고 고사리 꺾고 대사리(다슬기) 잡고 조개 잡고 소나무 캐고 칡 캐고…. “저 뭣하는 짓이여~?” 마을 정자에선 어르신들의 이야기가 무성했습니다.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이 제일 행복했습니다.
가끔 귀농인들이 우리 농장에 교육받으러 오시면 우리처럼 맘껏 즐기시라고 이야기합니다.
“농촌에서 잘못하면 일중독에 걸리고 내가 주인이 못 되고, 일이 주인이 되기도 한다”라고 말씀드립니다. 한 3년 정도는 일을 벌이지 말고 도시에서 못한 것 맘껏 하시고 그 다음 작물을 선택하라고 말이죠.
귀농한 지 2년째에 접어들었을 때, 남편이 서울에 계신 시할머니와 함께 살자고 했습니다. 남편은 어릴 때 시부모님이 장사를 하셔서 시할머니의 정으로 자랐습니다. 저도 일찍 친정엄마가 돌아가시고 할머니 정으로 자란 터라 그러자고 했지요.
시할머니께서는 멀미가 심한 분이셨지만, 서울에서 순창까지 1t 트럭에 앉아 한번도 탈 없이 내려오셨는데 너무 기뻐서 전날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하셨답니다. 그렇게 우리 부부와 큰딸, 할머니의 순창 귀농살이가 시작됐습니다.
좌충우돌 남들이 심는 것 다 심고, 남들이 키우는 동물 다 키우고, 내 역량도 모르고 땅이 나오면 닥치는 대로 다 받아 지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감당하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2002년, 둘째 딸을 출산하고 집을 새로 지으면서 빚이 많이 늘어났고 이를 갚아보려 영농 규모를 전투적으로 늘리기 시작했습니다. 일에 치여 둘째를 낳고선 얼굴 한번 마주치기 어려웠습니다. 그때 아이가 소변을 보며 경기를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한번씩 반복하기를 한달이 넘어 무슨 병인가 싶어 여기저기 의사선생님들께 문의하고 인터넷 상담도 받다가 충격적인 답을 들었습니다. 아이가 사랑받고 싶은데 말로 못하니까 몸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아기에게 평생 씻지 못할 마음의 병을 줄 뻔했다는 생각에 아기에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일이 끝나고 돌아오면 아기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점심때도 잠시 들러 아기에게 젖을 물렸습니다. 아기의 경기는 시나브로 줄어들더니 어느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2003년 겨울에는 200평 하우스 3동을 지으면서 일이 갈수록 늘어났습니다.
고추를 키우며 자연농업을 실천하려고 섞어띄움비·천연인산칼슘·당근효소토·토착미생물배양액·쌀겨띄움비·왕겨훈탄 등등 온갖 것을 만들어 토양과 작물에 주었습니다. ‘자타일체의 원리!’ 작물은 내 자식이다! 정성껏 만든 영양제와 퇴비로 고추농사를 지었지만 실패의 연속이었고, ‘우리가 더 크라고 그런가 보다’ 하며 실패를 배움으로 소화했습니다. 새로 지은 하우스는 강 옆 상습침수지역이었습니다. 천근성인 고추를 심다 보니 물에 취약해 비만 오면 가슴 졸이고 잠자다 빗소리가 요란하면 한밤중에도 나와 배수로를 정리해야 했습니다. 고추 역병과 태풍 매미·나비 등의 피해로 바닥까지 내려왔구나 싶었을 때 동네 어르신들이 하시는 미나리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남편에게 얘기했더니 바로 고개를 흔들더군요. 어려서 살던 동네 남자분들이 고된 미나리농사 때문에 아파서 다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어렵게 설득해 미나리를 하우스 200평에 파종하였습니다.
동네에서 말도 많았습니다. 하우스에 미나리를 심으면 다 썩어 농사를 망친다는 것입니다. 동네 어르신들께 물어물어 농사를 지어 미나리를 뽑아서 묶는 것까지는 했습니다만 시장에 가서 팔기가 어려웠습니다. 둘 다 숙맥이라 입을 열기가 힘들었던 것이죠. 체면만 차리다가는 살지 못한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장사를 배웠습니다. 미나리 한단을 1500원에 팔면서 땀의 소중한 대가를 알게 되었고 돈을 허투루 쓰지 않았습니다. 순창·옥과·담양 등의 5일장을 돌아다니며 미나리를 팔아 귀농 5년 만에 돈다운 돈을 벌면서 우리 부부는 미나리에 눈물이 날 만큼 감사했습니다.
첫 미나리 농사를 성공적으로 짓고 생각했습니다. “미나리는 물이 들어왔다 나가도 살 수 있다. 상습침수지역인 우리 땅에서 미나리를 만난 건 운명이다.” 그러나 토양이 딱딱해 뽑는 미나리를 키우기는 어려웠습니다. 어차피 미나리 말고는 이 땅에서 할 게 없으니 베는 미나리를 키우자고 했습니다. 수원·나주·밀양·청도 등 전국을 다니며 낫으로 베는 미나리를 공부했습니다. 2006년에는 미나리로 무농약인증을 받고 학교급식으로 조금씩 공급하면서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2009년에는 유기농인증을 받고 녹즙공장에 납품을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겨울에서 봄까지만 단기로 미나리를 키웠는데, 공장에 납품하기 위해 일년 내내 키우니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물관리며 여름철 병충해 관리 등 생각보다 어려웠지만, 책임이 주어지니 더 열심히 하게 되었고 200평 하우스는 8동이 됐습니다. 또 해를 거듭할수록 재배기술도 늘었습니다. 미나리발효음료 가공을 시작한 뒤로는 투자도 많아지기 시작했고 주변으로부터 시이오(CEO)란 말도 듣고 나름 “잘나간다”란 소리도 들었습니다.
그러던 2011년 7월, 전주에 납품하고 돌아오다 빗길에 1t 탑차가 미끄러지면서 중앙선을 침범해 대형 교통사고를 냈습니다. 앞만 보며 살아오던 우리 부부에게 교통사고는 삶을 뒤돌아보는 귀한 시간을 가져다줬습니다.
저는 골반이 두군데 깨져 한달을 꼬박 누워 있었습니다. 넷째인 막내가 돌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앞만 보고 살다 엄마, 아빠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면 우리 자녀는 무엇을 의지하며 살 것인가? ‘성공’이란 단어에 집착해 아주 작고 소소한 일상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잊고 살던 우리 부부를 발견하였고, 위기는 하늘에서 주시는 선물이란 것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고용 인력과 불필요한 모임을 줄이는 등의 경영개선을 통해 사고로 인한 여파를 이겨냈습니다.
2012년 겨울, 96세를 일기로 다섯명의 손주와 저희 부부를 사랑으로 돌보고 키워주신 시할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치매 투병 중에도 잠꼬대로 늘 아이들을 찾고 걱정하시던 할머니. 돌아가시고 나니 할머니의 빈자리에 부부는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2012년에 농촌진흥청으로부터 교육농장으로 지정돼 ‘가이아농촌교육농장’이란 이름의 새로운 농장이 탄생했습니다. 1년간 교육전문가들로부터 컨설팅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긴 시간 우리 몸에 밴 농사꾼의 틀을 깨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컨설팅 덕분에 부부 간에 일치하지 못하는 부분도 발견했고, 고된 시련의 시간 속에서 지쳐 있던 서로를 위로하기도 했습니다. 다섯명의 자녀를 키워온 시간과 유기농업을 고집하며 땅을 살리고 물속 생태계를 지켜온 우리의 삶이 교육농장 교사로서 엄청난 자산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013년은 지나온 시간을 정리하고 무엇에 열중하며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기였습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살자!”란 목표를 세우고 농장의 환경을 변화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미나리발효음료를 더 정성껏 만들기 시작했으며, 우리가 감사하며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발효음료를 소득만을 생각하기보다 드시는 분의 건강을 위해 만들자. 그것을 기쁨으로 여기자’라는 좋은 생각을 해서일까요? 후반기에는 미나리발효음료가 천식에 특효라는 방송이 전파를 타며 매출이 크게 늘었습니다.
또 농업기술센터의 지원을 받아 농장의 환경을 바꾸는 기회도 생겼습니다. 상습적으로 침수를 당하던 농장에 사면을 둘러싸는 360m 토성을 쌓고 그 위에 식물터널을 만들었습니다. 교육농장이지만 교육장이 없던 터라 직접 교육장도 만들었습니다.
교육공간이 생기니 체험객이 늘기 시작했습니다. 교육환경을 조성하고 프로그램을 개발해 농촌진흥청으로부터 지난해 농촌교육농장 품질인증을 받게 됐고 6차산업 융·복합 예비사업자인증도 받게 되었습니다. 점차 군의 도움을 받아 코레일의 레일그린 고객들이 대전·목포·서울 등에서 방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순창의 강천산 관광과 농촌체험을 결합한 상품이었습니다.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 농장 바로 앞 섬진강 자전거길에 올라 파란만장했던 우리 농장을 한눈에 바라봅니다. 누구라도 우리 농장에 오셔서 정직한 땀으로 키운 음식을 드시고 자연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오늘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6차산업이 뭔지도 몰랐지만, 어느새 우리가 6차산업을 하고 있었음을 주변에서 인정해줘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부부의 심성을 곱게 하고 아름다운 농장을 꾸미도록 이끌어준 것은 자연이 살아 있는 농촌입니다. 땀의 결실은 어떤 형태로든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철없는 부부를 품에 안아 크게 키워준 농업·농촌에 큰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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