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준회 씨, 귀농 3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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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준회 씨, 귀농 3년차
  • 이담비 기자
  • 승인 2016.01.28 1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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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은이 아빠의 귀농일기

▲딸과 함께 텃밭을 가꾸는 구준회 씨.
대도시를 떠나 농어촌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는 귀농귀촌 인구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아직은 농사를 짓기 위한 귀농보다 단순히 거주지를 바꾸는 귀촌이 많지만, 농업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으려는 사람들도 꾸준히 늘고 있다. “사실 귀농이라는 단어가 이제는 대명사가 되었지만 저에게는 귀농이라기보다 ‘순창으로 이사했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아요” 귀농 3년차에 접어든 구준회(39ㆍ풍산 두승) 씨가 “개인보다 귀농해 함께 일하는 사람들 소개가 먼저다”며 겸연쩍게 한 말이다. 스물 다섯 꿈 꿨던 귀농으로 순창에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그를 만났다. <편집자>

‘생협’ 어려워 ‘친환경학교급식사업’ 추진

구준회씨는 2014년 4월부터 ‘친환경학교급식사업’에 몸담고 있다. 서울에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하고 9년동안 직장생활을 한 그는 귀농을 결심하고 잘나가던 직장을 그만뒀다. 그리고 귀농에 도움이 될 거라는 기대로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이하 생협)에 취직해 농산물이 어떻게 유통이 되는지 배워, 시골에 내려와 직접 운영해 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2009년부터 생협 등에서 일하다 순창으로 귀농한 것은 2013년 11월이다.
우리지역의 농산물을 외부로 유통하기보다 지역에서 소비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생협’을 운영해 보려 했지만 곧 만만치 않음을 느꼈다. 협동조합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것인데 그가 생각한 것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기가 의외로 힘들었다는 것이다.
“도시는 대부분 농산물을 구매해서 먹게 되고 거기서 더 좋은 먹거리를 구매하고 싶으면 ‘생협’을 이용했어요. 그런데 막상 순창에 내려와 보니 도시와 전혀 다르게 자급자족하시는 분들이 많아 현실적으로 안 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그는 ‘생협’과는 조금 다른 ‘친환경학교급식사업’으로 눈을 돌리게 됐다.
“지역에서 친환경 농산물을 재배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그 농산물이 지역에서 소비가 다 이루어지지 않고 외부로 나가게 돼요. 그런데 유통하는 과정에서 마진이 커 도시에 있는 소비자들은 비싸게 사먹고 농민들은 제 값을 못 받더라고요. 또 학교급식에서도 친환경농산물을 취급하는데 다른 지역에서 재배한 농산물을 취급하는 것을 보고, 순창에서도 친환경 농산물을 재배하는데 굳이 타지 농산물을 들여야 하나 싶어서 순창에서 나는 친환경 농산물을 급식에 납품하는 방법을 알아보기 시작했죠.”
그가 처음 계획했었던 ‘생협’과 목표는 같지만 방법이 다른 ‘친환경학교급식사업’이 오히려 순창에서 더 잘 통했다. 순창에서 친환경농산물을 재배하는 ‘친환경연합회’ 회원들도 오래전부터 구상했던 일인데 그간 실무를 담당할 사람이 없어서 실행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실무책임을 맡고 친환경농산물과 관련 있는 많은 지역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는 농협 하나로마트를 통해 학교 급식에 들어가고 있으며 감자, 양파, 미나리, 고사리, 양배추, 오이 등 ‘친환경연합회’의 회원들이 재배하는 작물을 모아 납품하고 있다. 
 

가족 동의 얻고 ‘서울내기’ 귀농 결심

그가 시골에서 살아야겠다고 꿈꿔온 것은 아주 오래전이다. 대학생 때 쌍치면으로 농활을 온 것을 계기로 25살부터 꿈 꿔온 귀농을 마침내 37살에 단행한 것. 농활을 통해 순창군농민회 회원들과 친해져 농활 외에도 순창에 내려오고 서울에서도 만나며 연락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농사가 좋아 시골에 내려온 사람이라기보다 시골이 좋아서 내려왔다고 말한다.
귀농을 결심하는데 가족이 빠질 수는 없다. “보통 아내들은 시골 가서 살자고 하면 싫어하는데 다행히 처가가 전주고 아내도 순창에 농활을 왔던 캠퍼스 커플이었어요. 그래서 아내도 시골에서 사는 것에 대한 꿈이 있었고 제가 직장생활로 힘들어 할 때 오히려 아내가 <한겨레 21>에 귀농자 특집으로 보도된 ‘귀농인들이 새로운 삶을 살고 자기를 실현하는 내용’의 글을 보여줬어요.” 또 “부모님께서 처음에는 ‘우리가 너 시골에서 고생하면서 살라고 대학보냈냐’ 하시며 반대했지만, 평소 제 결정에 믿고 따라주시는 편이라서 금방 수긍하셨어요. 월급 받으며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둘 때 허락해주셨던 경험이 있으셔서 단련이 되어 있으셨던 것 같아요.”
그는 시골 생활이 좋은 점은 아내, 그리고 8살 딸아이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많다는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다가오는 6월에는 둘째도 태어날 예정이라고.  “지금 하는 일들이 서울에서 하던 직장생활의 개념이 아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나간다는 것에 대해 책임감은 많지만 보람도 많고 느끼는 성취감도 많아요. 또 경제적인 생활은 넉넉하지 않지만 심적으로 편안함이 있어 삶의 여유가 생긴 것 같아 좋고요.”
‘도시가 그립지 않느냐’는 물음에 망설이지 않고 “별로 많지 않다”고 답한다. “굳이 꼽자면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없을 때, 동네에 동갑내기 친구가 없다는 게 아쉽다”고 했다.
그는 귀농귀촌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역의 이웃들과 모임을 많이 활용하는 것이 좋은 것 같아요. 귀농귀촌에서 제일 많이 느끼는 것이 고독감이라 하더라고요. 물론 돈이 있어 시골에 투자해 농업을 할 수도 있지만 농업은 바로 성공을 맛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실패하는 부분이 있어 다시 도시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는데 이웃들과 관계를 잘 맺으면 적응해 나가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시골에 내려오기까지 가장 도움이 되어준 사람은 같은 마을(풍산 두승)에 사는 김효진 선배란다. “귀농을 결심했어도 새로운 생활에 잘 적응 할 수 있을지 하는 생각 등으로 종종 불안할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마다 말동무, 술동무가 되어주죠. 지금까지도 제가 가장 의지하고 친하게 지내는 분이에요.”

▲두부를 만들 콩물을 끓이고 있는 모습.
‘알콩달콩’ 두부 만들며 ‘정착’ 서로 도와

최근 그는 또 다른 일도 시작했다. 귀농인 5명이서 ‘알콩달콩순창협동조합’(이하 알콩달콩)을 만들어 두부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공장에서는 혼자서도 몇 백 개 생산이 가능하지만 저희는 3명이서 5시간 동안 만들면 100모 밖에 못 만들어요. 많이 파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최소한의 인건비만 가져가며 생활하고 순창에서 나온 농산물을 순창에서 소비하고 소비자도 좋은 먹거리를 구매할 수 있게 하자는 의미에서 하는 거예요.” 두부공장에서는 기계화 된 설비를 통해 콩물을 끓이는 것부터 직화가 아닌 증기를 쐬어 만들지만 ‘알콩달콩’에서 만드는 두부는 전통방식 그대로 가마솥에 콩을 넣고 나무주걱으로 1시간 동안 저어 만든다. “처음 귀농하신 분들이 첫 해에는 농사만으로 소득을 얻기가 힘드니 두부 만드는 것을 함께해 생활비를 가져갈 수 있게끔 해드리고 싶어요.”
지역 농산물을 지역에서 소비하고, 지역 농민들이 생산한 건강한 먹을거리를 지역 사람들이 소비해서 더욱 건강해지기 바라는 그는 ‘생협’ 계획에 이은 ‘친환경학교급식사업’이나 ‘알콩달콩 순창협동조합’ 결성 모두 돈 버는 사업보다는 귀농 성공(정착)과 도시에서 결심한 삶의 행복을 찾기 위해서다. 손수 만든 두부를 제대로 ‘상품화’하고 여유가 되면 콩물과 콩비지도넛도 만들고 연두부 등 다양한 상품을 개발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시골이 좋아 내려왔지만 단순히 자연주의의 흐름에 기대어 귀농을 꿈꾼 것이 아니라는 그는 시행착오도 겪었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곳에 내려와 보람과 성취감, 편안함, 삶의 여유를 맛보았다”며 “지속 가능한 삶의 실천, 스스로 수급하는 소박한 꿈을 이뤄가고 있다”고 말했다. 힘들지만 이 소중한 경험은 앞으로 그의 인생에서 값진 밑거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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