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세(過歲)
을미년 한 해도 쏜살같이 달려가 섣달 그믐이 불과 며칠뿐이고 새해 병신년이 다가오고 있다. 이와 같은 섣달그믐이 닥치면 연례행사처럼 과세 철학이 남다른 선현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 중 몇 분의 실천 사항을 살펴보기로 한다.
학자요 시인으로 유명한 소동파(蘇東坡) 선생의 과세철학은 평상시 집에 손님이 오시면 의례히 부인은 금비녀를 들고 나가서 술을 받아가지고 들어온다. 집에 돈이 없어 가장 쉬운 방법으로 금비녀를 가지고 나가 술을 사온 것이다. 이를 모를 리가 없는 소동파 선생은 섣달그믐날이 되면 저잣거리를 어슬렁어슬렁 걷고 다닌다. 돈 많은 상인들이 앞 다퉈 모셔다가 새해 아침에 문기둥에 붙일 춘첩자(春帖子)를 써달라고 하면 써주고 사례금을 주면 받아가지고 평상시 부인이 술값으로 잡혀놓은 금반지, 금비녀, 은비녀, 옥비녀를 찾을 만큼 생기면 마쳤다. 이 사실을 아는 상인들이라 서로 앞 다투어 모셔간다. 소동파 선생은 사례금으로 아내가 잡혀놓은 금비녀 옥비녀를 찾아들고 술 한 병 사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때가 일 년 중 제일 기쁜 날이라 하였다. 가난하지만 아내가 맡겨놓은 비녀를 본인이 번 돈으로 찾아들고 집으로 향하는 시인의 심정을 누가 진심으로 이해할 것인지 현대인들은 이해 난이다.
중국 당나라 때 장안에 송청(宋淸)이라는 유명한 한의원이 있었다. 병을 잘 고친다는 소문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데 병은 고쳐야겠고 돈은 없는 사람도 두말없이 약을 지어주고 약값은 차용증서를 받아놓았다. 그 중 약값을 갚는 사람도 있지만 못 갚는 사람의 차용증서가 한보따리였다. 섣달그믐날이면 이 증서를 몽땅 가지고 뒤뜰에 나가 한 장씩 불을 붙이며, 불에 타는 차용증을 바라보는 재미로 불사르고 새해는 약 파는 장사를 새 마음으로 시작하니 그 약을 먹고 낫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했지만 약값을 못 준 사람 가운데 관찰사도 되고 절도사도 되어 후하게 반례를 하니 돈을 버는 것이 어찌 유쾌한 일이 아니겠느냐고 하면서 섣달 그믐날 불사른 증서의 연기가 제일 쾌사(快事)라고 하였다고 한다.
명나라 말기에 유명한 철학자 김성탄(金聖嘆)은 스스로 나는 성인군자가 아니기에 양심에 가책 받은 착하지 못한 일(不善)을 저지른 것이 많다면서 섣달그믐날이면 동분서주하면서 불선(不善)을 저지른 일을 사람들에게 낱낱이 고백하고 다녔다. 이것을 본 사람들이 미친 사람이라고 하여도 본인은 깨끗이 청산하고 새해를 시작하는 즐거움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옛 선현들이 잠시라도 자기 과오를 청산하기 위하여 정신적으로나마 노력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필자와 같이 천박한 사람이 선현들의 흉내라도 내어보고자 금년 섣달 랍일(臘日)에 눈이라도 내리면 랍설수(臘雪水)라도 만들어 신세 진 몇 분에게라도 보답하여 볼까 하고 랍일을 적어놓고 기다렸으나 십년에 한 번 쯤 내린다는 랍설이 나와 같은 사람에게 와주지않았다. 랍일이 지나고 폭설이 쏟아지는 것을 보고 천박한 사람이 선현들의 흉내라도 내려고 하였으나 하늘은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을 어찌 하겠는가. 자탄할 수밖에 도리가 없다.
과세(過歲) : 설을 쇰.
춘첩자(春帖子) : 입춘 날 대궐 안 기둥에 써 붙이던 주련(柱聯). 연잎과 연꽃의 무늬가 있는 종이에 제술관이 지은, 축하의 시를 써서 붙였다.
납일(臘日) : 동지(冬至) 후 셋째 미일(未日). 납평(臘平) 또는 가평절(嘉平節)이라고도 한다. 납일은 원래 중국에서 유래된 풍속이지만, 그 날짜를 정하는 데는 나라마다 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