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싸움을 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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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싸움을 해야 하는 이유
  • 림양호 편집인
  • 승인 2016.04.14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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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으로 돌아간 사람도, 도청에 남은 사람도 계엄군에 맞서 이길 거라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을까요? 없었습니다. 불을 끄고 이불 속에서 여성의 호소를 들으며 숨죽이고 있었던 광주의 시민들, 도청 안에서 총을 들고 계엄군의 무력진압에 맞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던 시민군들 중 누구도 무장한 계엄군에 맞서 살아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중략) 그때 그들이 총을 내려놨더라면 우리 현대사에 광주는 없었습니다. ‘광주는 우리에게 어떻게 이길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질 것인가’라는 화두를 던졌습니다.”(역사학자 한홍구 선생의 5ㆍ18 광주민중항쟁 관련 강연 일부)
# “지난 2월, 테러방지법 직권 상정에 반발해 47년 만에 국회에서 펼쳐진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을 통한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두고 ‘어떻게 해도 결국 표결로 질 게 뻔하다. 무용지물이며 정치쇼다. 지는 싸움에 매달리지 말고 다른 걸 해야 한다’며 비난하는 이들과 ‘필리버스터를 통해 천박한 말로 오염된 정치에서 품위 있는 언어를 건져냈고, 법의 논리를 조목조목 설명하는 입법자들의 기본 의무를 보여줬다. 나는 그들 중 하나가 읽어 주는 걸 들으며 헌법이 얼마나 아름다운 문장으로 구성되었는지를 새삼 깨달았다’는 이들로 나눈 상황을 기억한다.”
# “끝내 수학여행을 가지도 못하고 돌아오지도 못한 세월호 250명 친구들을 보내고 2년을 보냈다. 안산 정부합동분향소 입구에는 ‘저 하늘의 별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믿습니다 특별조사위원회!’라고 적힌 펼침막이 붙어 있다. 희생자들은 영정 속에서 ‘우리가 왜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떠나야 했는지 말해보라’고 꾸짖고 있다. ‘2014년 4월16일 아침 전남 진도군 맹골수도 사고해역 수온은 12.6도, 승객들이 구명조끼를 입고 떠 있었다면 6시간은 버틸 수 있었다. 근처엔 50여척의 어선까지 대기 중이었으니 충분히 살려낼 수 있었다’고 한다.”
광주항쟁에서 희생된 시민들, 다수 집권당의 횡포에 맞선 의원들, 송전탑 건설에 맞선 밀양 어르신들, 9년 동안 700여명이 연행되고 3억7000여만원의 벌금을 물린 제주 강정마을 주민들, 1992년부터 진정한 사과를 요구하며 ‘수요집회’를 계속해온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찬란한 봄날 찬란한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의 진실규명을 호소하는 피해자 가족들까지도 결국은 지는 싸움을 하고 있는 걸까. 어차피 질 거 이따위 ‘반항’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냉소하며 비웃고 힐난하는 사람들이 도처에 넘쳐나도 ‘지는 싸움’이 왜 필요하고 왜 의미가 있는지 알려야 한다. 이 싸움들은 ‘거대한 권력의 부당한 합의 철회와 정의로운 문제해결’을 요구하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지는 싸움’이라는 규정은 싸우기도 전에 패배의 전조와 불안을 가져온다. 미래도 현재와 다를 바 없다는 포기와 절망에 갇히면 어떤 결과가 발생할지 알 수 없으면서도 ‘지는 싸움’이라고 미리 단정하게 된다.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항거, 상상할 수도 없었던 권력에 대한 반항에 미리 겁먹으면 모든 싸움이 ‘지는 싸움’이다. 따라서 선거에서도 ‘이기는 싸움’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번 선거에서 녹색당ㆍ노동당ㆍ민중연합당 등에 지지가 박한 것도 어차피 지는 싸움에 표를 ‘낭비’한다며 미리 포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내에 들어가지 못한 노동당ㆍ녹색당ㆍ민중연합당이 노동자ㆍ농민ㆍ서민ㆍ환경을 위해 더 많은 땀을 흘리는 현실은 엄연한 사실이다. 
선거가 아니어도 ‘지는 싸움’에 휘말려 결단에 내몰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변화되지 않는 제도와 권력 앞에서 아주 작은 문제를 제기하다 ‘지는 싸움’의 덫에 빠질 수 있고, 엄청난 고통을 당할 수 있다. 그래서 기성세대나 기득권을 가진 이들은 자신들이 판단한 ‘이기는 싸움’ 외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른바 ‘지는 싸움’을 도맡아 하는 사람이나 집단에게 ‘어차피 질 싸움에 왜 인생을 낭비하느냐’는 훈계나 질책, 비난과 모욕보다 ‘왜 어차피 지는 싸움을 시작하려 하는지, 왜 도맡아 할 수 밖에 없는지, 그 싸움의 의미와 결과는 누구를 위한 것인지’ 잘 살펴보고 돕고 지원할 방도를 찾아 힘을 보태야 세상이 바뀐다.
총선이 끝났다. 박근혜 정권의 오만과 독선에 대한 심판이 내려졌다. 국민은 국회 제1당을 바꾸고, 호남은 ‘더민주’를 버리고 ‘국민의당’을 선택했다. 민심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생생히 보여준 선거였다. 박근혜 정권에 대한 분노와 실망은 16년만에 의회 권력을 재편하는 ‘여소야대’의 결과를 보이며 여ㆍ야 모두에게 각성과 성찰을 요구했다. 패자는 물론 승자도 국민 앞에 겸허해야 한다는 엄중한 경고다. 봄날, 세월호ㆍ광주ㆍ밀양ㆍ제주, 위안부 할머니ㆍ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생각한다. 뭐가 달라질까. 어떻게 바뀔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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