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송정마을과 장판개 이야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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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송정마을과 장판개 이야기(2)
  • 이기수 독자
  • 승인 2016.08.11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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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수(금과 송정)

장판개(1885~1937) 선생은 고종22년에 태어나셨고 소리 음율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7세 때에 이미 득음을 제외한 나머지 분야는 스스로 깨우쳤다고 합니다.
금과면 송정마을과 연화마을은 걸어서 20~30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송정 너구리골 오가리폭포가 수련하기에 적당한 요건을 갖추고 있었고 송정마을엔 선생의 고모님이 출가하여 살고 계셨기 때문에 선생이 자유롭게 연습을 오갈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송정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열살 된 선생이 비가오나 눈이와도 오직 소리에만 전념하는 의지를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고 이구동성으로 칭찬했다고 합니다.
장판개 선생이 12세일 때 조선의 정세는 개혁의 사회적 바람이 농민들에까지 전달되고 있었으며 전국은 마치 요동치는 물결과 같았다고 합니다. 당시 아미산은 땔감 채취로 민둥산처럼 보였고 약대(늑대)가 많이 서식하는 장소이기도 했으며 그런 연유로 비오는 날의 선생 소리가 동네사람들 사이에는 약대 소리냐, 판개 소리냐를 놓고 내기를 하는 이도 많았다고 합니다.
송정(금왕리)에는 조선왕도 종친가가 살고 있었는데 임실 둔덕리와 곡성 오곡리를 거쳐 순조6년 탕평책 폐지를 반대하고 안동김씨와 풍양조씨의 세도정치 견제로 인해 부득이 순창 금왕리에서 세거하게 되었답니다
갑오개혁 이전 어느 날 흥선대원군(1820~1898)이 4년 간의 텐진 볼모 생활을 끝내고 날로 어지러운 정세를 바로 세우기 위해 금왕리 종친을 만나 국정의 안정을 논하기 위해 방문하셨는데 이때 대원군의 방문을 문안하기 위해 순창군수, 담양부사, 옥과현감이 왔으며 이런 사실을 알고 있던 이항로의 제자 최익현(1833~1906)과 서유견문록의 일본유학파 유길준(1856~1914)이 알현을 청하니 마을 종친께서 이들을 모두 핍허루로 안내하였고 함께 자리한 일곱분 외에 한사람의 보필자가 더 있었는데 이는 순창 관아 집사 겸 군수 호위무사인 송정마을 출신 동탁군 김씨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김씨는, 어느 해인가 호남지방에 극심한 여름가뭄이 들자 무제를 드려야만 했는데 당시 순창군수 입장에서는 양명학, 동학 등 위정척사사상으로 신앙적인 행위가 사실상 금지된 터였고 한편으론 한해 극복에 실패하면 민란이 예상되었으므로 고심 끝에 은밀히 무제장소를 옮겨 지정한 곳이 금산 뒤편 복실리 광암길이었습니다. 동탁군은 세종대왕 때 농사직설편찬위원회(집현전)의 결정으로 송정마을 핍허루 뒤편 전라좌도 옥천군 무제단의 관례를 따르지 않은 것에 문제를 삼고 있을 쯤 부처님의 좌우보살님이 현몽하여 이르기를 택일자리에 분항(똥물)을 치고 유골을 묻어 분묘를 지으라, 그리하면 원래대로 무제단에서 공을 빌것이며 비를 내려주겠다 하니 곧바로 시행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순창 동탁군 전설입니다.
한편, 핍허루에 모인 당대 최고의 3인방격 지도자들은 그야말로 진공상태의 중압감에 빠져들고 있을 때 핍허루 앞 금색찬란한 맑은 물가의 뜸부기 내는 소리는 민족 사상가들의 고동소리를 더욱 채찍질했을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먼저 논제를 내 놓은 사람은 가장 젊고 조선 개혁을 강력히 주장한 친일 유길준이었습니다. 유길준은 일본식 세계적 경제개혁(산업혁명) 방식, 의회민주주의, 프로이센상법(1794) 자본주의 채택 등으로 호남철도회사 설립의 계획을 모델로 하는 실상개화론(반, 허명개화론)을 주장했고, 최익현 선생은 조선의 전통성과 민족자결에 입각 성리학적 형이상학의 존치를 바탕으로 보국안민 척양척왜가 우선시되어야 하며 양명학(실학의 단초)을 금지하고 당파정치를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개혁방식에 대한 두 사람의 논쟁은 격돌하였습니다. 이후에 갑오농민혁명(1894)과 을미사변(1895, 명성황후시해사건)을 겪은 후 유길준은 일본으로 도망을 갔고 최익현은 순창에서 구국항일의병의 항쟁으로 유명했습니다. 또한 유길준이 남긴 호남철도회사 계획은 일제강점기 때 순창과 송정마을의 문화말살에 참고자료로 둔갑해 시행되었답니다.(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산미증식계획위원회)
아무튼 이날 핍허루에서는 위 두사람의 충돌로 참혹했다고 전하며 이 상황을 지켜보고 계시던 흥선대원군께서는 조선의 당면한 문제에 대단히 심기가 분노하였으므로 함께 자리하고 있던 종친어르신과 옥과현감만을 지명하여 마을 앞 평상석 정자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대원군께서는 한참동안 말없이 아미산 폭포수를 바라보면서 심신을 달래고 있을 즈음에 너구리등 오가리폭포에서 판소리 연습을 하고 있던 장판개 선생이 바로 밑 할매바위 근처에서 초여름 보리타작을 하고 있는 금왕리 안골 두레패 일꾼들 사이에 끼어 어사화를 머리에 쓰고 유유둥실 춤을 추며 “저 건너 갈미봉에 비묻어 온다 우장삿갓 챙겨들고 집으로 가세” 농요 들소리를 선보이고 있었답니다. 이 광경과 소리(노래)가 대원군이 보시기에 어찌나 아름답고 평안하였던지 장판개 선생을 불러놓고 하문하시기를 “너는 어디 사는 누구냐?”
선생이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전라관찰사 좌도 옥천군 목과방 매우면 삿갓촌 출생 장판개입니다.” “하하 참으로 조선의 아름다운 백성이로구나. 너의 재능이 참으로 귀하니 당당한 우리 민족의 소리를 널리 베푸는 직임을 갖거라”하시고 옥과현감에게 명하여 장판개가 훌륭하게 장성하도록 도와서 조선의 인재로 삼으려고 하셨답니다. 몇 년 후 옥과현감이 겸면에 거처를 마련하여 선생이 득음을 갖도록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이때 장판개 선생의 나이가 17세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장성한 선생은 판소리 뿐만아니라 민족주의 사상에도 많은 지식이 있었으며 고종황제와 정세를 논하고 판소리도 하고 벼슬도 받았다고 합니다.
일제강점이 시작되면서 우리 풍습, 문화, 노래 등을 금지시켰고 선생은 고향인 순창으로 오셔서 송정 오가리폭포에서 몇몇 제자들을 양성하시던 중 지병이 깊어 53세의 나이로 찬란한 삶을 마감하셨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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