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보물여행(3) 순창읍 대모암 ‘홀어미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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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보물여행(3) 순창읍 대모암 ‘홀어미산성’
  • 황호숙 해설사
  • 승인 2016.10.05 15: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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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떠나는 ‘순창보물여행’

 

▲순창읍 백산리에 있는 홀어머니산성. 양씨 부인이 정절을 지키기 위해 성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사진 순창군청 누리집>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70호 순창읍 ‘대모산성’
구전설화 다수 … 양씨 부인과 설씨 총각 ‘사연’
역사기록, 세종실록지리지ㆍ신증동국여지승람성

 

어려서부터 순창에서 사신 분들도 ‘홀어미산성’이 어디에 있냐고 물으면 잘 모르시더라고요. 혹시 ‘대모산성’이라고 하면 아시려나요? 순창읍에서 백산마을 가기 전 청소년센터 맞은편으로 조그마한 산이 하나 있는데 조금 올라가면 ‘대모암’이 있고 조금 더 올라가면 석축들이 드문드문 보이는 산성 터가 보입니다.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70호로 지정되어있죠. 그러니까 이곳이 순창에서는 역사적으로나 민속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이랍니다. 무슨 이야긴지 술술 풀어나가 볼까요.
순창은 옛 백제시대에는 도실현이라 불렸죠. 이 대모산성 터를 조사 발굴한 결과 백제시대의 기와가 다량으로 출토되어 도실현의 고지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네요. 순창군은 마한시대에는 소석색국, 백제시대에는 도실현, 통일신라 때는 순화군(淳化郡)으로 바뀌었다가, 고려시대에 순창군이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따지고 보면 홀어미산성은 백제 때 축성되어서 고려와 조선 초에 걸쳐 군창으로 사용하였다고 보는 거죠.
그렇다면 이 대모산성은 누가 쌓았을까요. 세 가지 정도의 설화가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만 살펴볼까요.
“대모산에 젊어서 과부가 된 양씨 부인이 홀로 살고 있었는데, 같은 동네에 살고 있던 설씨 총각이 양씨 부인을 연모하여 같이 살 것을 종용하였다. 절개를 지키고자 재가를 할 생각이 전혀 없던 양씨 부인은 그런 말을 하지 말라며 정색하고 거절하였다.
그러나 설씨 총각은 막무가내로 덤벼들었다. 양씨 부인은 그가 보통으로는 설득할 수 없음을 알고 내기를 해서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 주기로 약속하였다.
양씨 부인은 대모산에 성을 쌓고, 설씨 총각은 나막신을 신고 한양에 가서 남대문 문패를 떼어 오는 것을 누가 먼저 하는가 내기를 하였다. 만약 설씨 총각이 한양에 갔다 오기 전에 양씨 부인이 성을 다 쌓으면 결혼을 안 할 것이고, 성을 쌓지 못하면 결혼을 허락하기로 한 것이다.
내기는 바로 다음날 시작되었다. 양씨 부인은 치마폭에 돌을 담아 나르며 열심히 성을 쌓았다. 마지막 돌 한 덩이만을 더 올려놓으면 성이 완성되려는 찰나에 한양을 다녀온 설씨 총각이 남대문 문패를 들고 도착하였다. 결국 양씨 부인은 내기에서 지고 말았다.
설씨 총각은 양씨 부인에게 자기와 결혼해 줄 것을 강요하였다. 어쩔 수 없이 말을 들어주어야 했던 양씨 부인은 정절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러자 양씨 부인은 돌을 나르던 치마를 뒤집어쓰고 대모산 아래 흐르는 강물에 몸을 날려 빠져 죽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도 시집가는 신부의 신행길은 이곳을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나라 성곽설화에는 거구의 힘센 여성, 또는 노구 할머니가 돌을 들어서 성을 쌓는 축성 설화가 많은데 순창은 힘센 과부와 정절의 개념이 함께 들어가 있다는 거죠.
역사적인 기록은 1454년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대모산성. 둘레가 290보이며, 안에 작은 샘이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아니하며, 군창이 있다”고 되어 있어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비슷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영조 때 펴낸 「문헌비고(文獻備考)」에는 “대모산성은 군의 서쪽 4리에 있다. 석축이며 주의는 780척이고 안에는 샘과 못이 각각 하나씩 있다. 원나라 초에 한 할미가 아홉 아들을 데리고 성을 쌓고 여기에 살았다. 많은 곡식을 모아 관곡을 삼았는데 지금은 폐해졌다”라고 되어 있어요. 한 할미를 흔히 노구, 또는 대모(大母)라고도 칭했는데 바로 위대한 어머니를 뜻한답니다.
순창지역에서 대모라 일컬을만한 여인들은 여인들의 길에서 다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팔왕마을 연봉석 이야기에 나왔던 옥천조씨부인으로 유방이 4개여서 8명의 아들을 낳아 중앙 관직에 3명을 등과시켜 나중에 국대부인으로 존호가 내렸던 분, 기억나시지요.
다음 호에 나갈 권선문첩을 쓴 규방문학사의 우뚝 솟은 봉우리라는 설씨부인, 그리고 마지막 동계 구미마을에 터를 잡고 자손을 번성시킨 이씨 할머니가 순창에서는 대모로 손꼽는 분들이죠.
지난 1992년에 발견된 순창 성황 대신 사적 현판(중요민속문화재 제238호)에는 홀어미산성의 여신으로 대모(山城大母)가 등장합니다. 성황당에는 성황대왕과 성황대부인을 배향하는데 특히 단오절 성황제를 지낼 때는 홀어미산성에서 여성황신을 모셔와 옥천동 성황당에 배위시킵니다. 성황제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물통골 이야기 할 때 더 하겠습니다. 
이러니 얼마나 이 대모산성이 중요한 곳이었겠습니까. 또한 아들이 없는 사람은 영험한 절에 가서 치성을 드리는데, 이 ‘대모암 칠성당에서 정화수와 쌀, 돈 등을 놓고 공을 들이면 큰 효험을 봤다고 합니다. 기자의례라고 하지요.
지난주에 문화관광해설사들과 강천산과 인접한 금성산성을 6시간 등반했었는데 금성산성 남문에서 시작해서 동문, 북문, 서문을 거쳐 남문까지 한 바퀴 완주 하면서 잘 가꾸고 복구해놓은 금성산성을 보면서 가슴 한쪽이 아려왔습니다.
반면 우리 지역의 중요한 역사적 자료가 되는 홀어미산성이 다 무너지고 흔적도 없어지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졌어요. 백제 시대의 고지이며 군창이었고 단오절 중요한 의례가 행해지고 성황대부인의 혼령을 모시고, 지극한 기자의례가 이루어지던 대모산성과 대모암이 복원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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