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보물여행(4) 설씨부인을 다시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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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보물여행(4) 설씨부인을 다시 생각하다
  • 김태현 해설사
  • 승인 2016.10.20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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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떠나는 ‘순창보물여행’ 3
김태현 문화관광 해설사

 

▲광덕산(강천산)에 불사를 세우기 위해 신도에게 시주를 권하는 문장과 사찰도를 그린 설씨부인 권선문첩.  <사진 문화재청 누리집>

 

집현전 학사 신숙주의 아우 ‘신말주’의 정부인
유품 ‘설씨부인 권선문첩’ 보물 728호로 지정

오늘 소개할 설씨부인은 조선왕조 초 집현전 학사로 훈민정음을 만드는데 큰 공을 세운 고령신씨 가문 신숙주의 아우인 신말주의 정부인이다. 설백민의 외동딸로 순창에서 태어나 신말주에게 출가했다. 신말주 선생은 단종 2년인 1454년 26살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고 권지정자(權智正字 : 외교문서를 다루는 관청의 정9품계)의 자리에 있다가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르자 벼슬을 버리고 부인 설씨의 고향인 순창으로 내려온 실학자이다.
우선 설씨부인의 가계도를 살펴보자. 귀래정 신말주 선생은 고령신씨이다. 경상도 고령을 관향으로 하는 그의 집안은 고려 중기 인물인 신성용(申成用)을 시조로 하여 신말주의 부친 신장(申檣)에 이르기까지의 7세가 모두 문과를 거쳐 중앙의 관계에서 활약하며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다. 신말주의 증조부 신덕린(申德隣)은 절행과 문장에 있어서도 이름이 높아서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치은 길재 등과 함께 고려의 육은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또 초서와 예서에 능하여 덕린체라는 서체를 남길 정도였고 산수화에도 능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산수화 1점을 남겼다. 신말주의 조부는 고려 우왕때 문과 급제하여 대사헌, 공조참의 등의 벼슬을 지냈고 이선서오세(以善書嗚世: 아름다운 글씨로 세상을 탄식케 함)일 정도로 글과 문장에 뛰어난 사람이다. 이외 방계로는 조선 초의 문인화가 신잠(申潛) 등 다수가 아름다운 문장과 그림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있다. 신말주 후세로는 7대손 신유(申濡)와 신유의 여동생 정경부인 신씨, 8대손 신선부(申善溥), 10대손 신경준(申景濬), 11대손 신택권(申宅權) 등이 문장뿐 아니라 회화에 출중했다. 특히 신경준은 지리학 분야에 조예가 깊어 ‘북방강역도’와 ‘강화도 이북의 해역도’ 등 다수의 지도를 남겼다. 잘 알려진 천재화가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은 서출이지만 신말주의 11대 손이다. 이외에도 신말주의 8대 신세담(申世潭), 9대손 신일흥(申日興), 10대 신한평(申漢枰) 등 도화서 화원이 배출되었다.
이처럼 신말주 일가는 화원과 회화 세계에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들이 많다. 회화에 탁월한 유전자를 대대로 남겼음이 분명하다.
설씨부인의 친가인 옥천(순창)설씨는 경주설씨에서 분기하여 이자겸의 난을 피해 아내(옥천조씨)의 고향으로 내려온 설자승이 중시조이다. 순창에 뿌리를 내린 후에 순창의 성황대신으로 모셔진 설공검을 위시하여 설공검의 아우인 설인검, 설지충과 최초의 국문번역소설로 알려진 설공찬전으로 유명한 설공찬에 이어 독립투사인 설진영 등의 인물을 배출하였다.
참고로 설씨부인은 외동딸이어서 고령신씨 귀래정파 문중에서 외손봉사를 5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하고 있다고 한다.
설씨부인과 신말주 선생의 혼사는 지역의 명망있는 두 가문의 결합이었다. 설씨부인은 태생적으로, 또한 신말주 선생과의 혼인을 통해 인문학적 특히 고령신씨 가문의 예술적인 가풍과 유훈을 이어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설씨부인의 유품은 두 점이다. 보물 728호로 지정된 ‘설씨부인권선문첩’과 전설 속에 등장하는 새를 그린 ‘화조도’가 있다. 학계에서는 화조도가 설씨부인의 작품인지에 대해 다양한 이견이 존재하기에 여기서는 ‘설씨부인권선문첩’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로 하겠다.
설씨부인 권선문첩은 광덕산(강천산)에 불사를 세우기 위해 신도 대중들에게 시주를 권하는 문장을 적고 사찰도를 그려 넣은 요즘 말로 펀드레이징(fund raising)을 위한 문화첩이다. 현재는 16폭 문첩 형태로 전해지고 있으나 제작 당시는 한 질의 두루마리 형태로 제작되었으나 나중에 문첩 형태로 접철된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 권선문첩은 조선조 유일무이한 여류화가인 신사임당에 70년이나 앞섰고, 신사임당의 작품은 거의 풀과 벌레(草蟲) 위주이나 여성이 그린 산수화이며 극히 드문 채색화라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두 첩 화폭과 14폭 글로 이루어진 권선문첩에는 광덕산 강천사를 염두에 두어 그린 것이 분명한 산수화를 포함하고 있다. 이는 한국화의 시조로 평가받고 있는 겸재 정선의 동국진경산수화(東國眞景山水畵)를 시대적으로 앞서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문첩에 적힌 문장도 선을 행하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 복이라는 결과를 받는 인과법(因果法)에 의거하여 논리 정연한 전개를 이루고 있어 설씨부인의 높은 학식을 느낄 수 있다. 또 현재는 보편적인 형태로 사용되고 있으나 당시에는 불교에서만 사용됐던 ‘여성’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세속적인 의미로 사용한 것이 확인된 바 설씨부인의 선지적인 탁월함과 영민함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안타깝게도 설씨부인의 다른 작품, 인품, 일화 등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권선문은 일종의 속문(俗文)인데 설씨부인의 문체나 문장 실력으로 보아 권선문 이외 문학적으로나 예술적으로 향기가 높은 작품을 지었을 가능성은 아주 높으나 더 찾아 볼 수 없음이 안타깝다. 개인적으로 더 안타까운 것은 설씨부인의 본명에 관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지체있는 부녀자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는 것은 금기시되어 왔기에 신사임당의 본명 ‘인선(仁善)’이 많이 알려지지 못했듯이 신사임당보다 70년 정도 앞선 설씨부인이 본명을 남기지 못한 것이 자못 안타깝다.
순창은 여러 가지로 여성성이 강한 고장이라고 이야기된다. 순창의 본류인 장류문화는 그 태생부터 여성들 고유의 문화였다. 남원양씨를 다시 세운 동계 구미마을의 직제학 양수생처 열부이씨, 홀어미산성을 홀

로 쌓았다는 양씨부인, 팔왕마을 연봉석 이야기의 주인공 옥천조씨 부인, 전국 최고의 자수를 수놓았다는 근대 순창처녀 자수시장 등의 역사는 순창 이곳저곳에 흐르고 있으며 살아있는 생명력으로 존재한다. 인지하던 못하던 오늘도 저편 밭에서 고구마를 캐고, 동네 어귀에서 나락을 펴서 말리는 우리 동네 아짐들의 마음과 정신 속에도 순창 여성들의 강인함과 지혜로움은 살아 숨 쉬고 있다.
이런 어머니의 역사가 기저에 흐르고 소박하나 아름다운 천혜의 자연환경이 어우러진 순창에서 살게 된 것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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