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보물여행(13) 선비정신 빛나는 ‘삼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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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보물여행(13) 선비정신 빛나는 ‘삼인대’
  • 황호숙 해설사
  • 승인 2017.03.15 17: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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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떠나는 ‘순창보물여행’

벼슬과 직인을 어찌 가볍게 버리랴마는
느슨해져서 또한 오래 머뭇거려진다.
본래 진취를 탐냄은 아니었으니
편리한 때를 보아 일을 도모하리다.
두 사람의 뛰어난 영웅이여
힘써 세상을 밝혀낼지어다.
-눌재 박상(朴祥)의
증유계언겸기금원충(贈柳啓彦兼寄金元沖) 중에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7호 ‘삼인대’

순창의 논두렁이나 길가에도 봄까치꽃이 여기저기 피어나고 있네요. 아지메들 가심(슴)이 봄처녀처럼 콩닥콩닥 뛰길 바라는 첫마음 해설사 황호숙입니다.
강천사의 풍경소리와 돌담을 뒤로하고 시원하게 약수터에서 꿀꺽꿀꺽 물 한 모금 마시고 나면 정면으로 ‘절의탑’이라고 쓰인 돌탑이 보입니다. 강천산 5층 석탑과는 비교가 안되지만 나름 꼿꼿한 선비정신이 엿보이지 않나요. 2004년 300여개 넘는 각 마을에서 돌 2개씩 가져와서 쌓았다고 하더라구요. 와우! 놀랍지 않나요? 이곳에 구림 회문산의 역사적인 돌도 있고, 동계 섬진강 장군목 물소리 듣던 돌도 있고, 팔덕 팔왕마을 연봉석 기운을 받은 돌, 복흥 가인 김병로 선생의 의로움을 닮기도 한 돌들이 모여 있다니! 발길을 잠깐만 멈춰보세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순창의 돌들이 강천사 앞에 모여들어 탑을 만들었을까요?
바야흐로 때는 조선의 폭군으로 유명한 연산군 시절, 무고한 대신이나 선비들이 역적으로 몰려 죽는 경우가 다반사였던 시절, 이복형제인 아우 진성대군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한 세월을 보냅니다. 당시 부인은 거창신씨 부인이었는데, 13살 나이에 진성대군과 결혼하면서 최대한 몸을 낮춰야 살아남을 수 있다며 한 살 어린 지아비를 다독였답니다. 친정아버지가 연산군의 처남 신수근 이었는데 반정이 일어난 날 즉시 처형됩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반정이 일어 난 날 밤 기록이 있는데, 진성대군은 “올 것이 왔구나, 저렇게 무장한 세력들이 집을 둘러쌓았으니 나를 죽이러 온 것이 분명하니 스스로 목숨을 끓어야 겠구나” 하지만 신씨부인이 “아닙니다. 군사들의 칼이 집안을 향하는지 바깥을 향하는지 보아서 바깥을 겨누었다면 우리를 보호하려 하는 세력일겁니다. 목숨은 차후에 결정하셔도 늦지 않습니다”라고 해서 새벽에 왕이 되니 바로 드라마 대장금에 나오는 11대 중종입니다. 하지만 신씨부인은 왕비로 추대된 지 7일 만에 인왕산 부근의 사가로 쫓겨나는 비운의 왕비가 되지요. 왜냐구요? 중종실록 1년 9월 9일에는 그 상황이 기록돼 있습니다. “지금 신수근의 친딸이 궁중에 있습니다. 만약 중전으로 삼는다면 인심이 불안해집니다. 인심이 흩어지면 종사에 위해가 되니 은정을 끊어 밖으로 내치소서.”
혹시 인왕산 치마바위 전설 기억 하시나요? 바로 중종이 조강지처를 못 잊고 인왕산 쪽을 자주 바라본다는 말을 듣고 즐겨 입던 붉은 치마를 궁궐에서 잘 바라다 보이는 바위위에 걸쳐 놓았다는 애틋한 사연이 있지요.
자! 다리 건너 소나무와 삼인대쪽으로 걸어가 볼까요? 정면과 측면에 각 1칸의 삼인대 비각이 있고, 비각 안에 높이 157㎝, 너비 80㎝, 두께 23㎝의 삼인대 비가 세워져 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신씨를 내쫓고 왕후를 맞으니 10년 후 세자(훗날 인종)를 낳고 죽은 장경왕후입니다. 왕비의 죽음과 함께 날씨마저 오락가락 하고 별이 며칠씩 하늘에 떠있는가 하면 발이 다섯 개 달린 송아지가 태어나기도 하였지요. 따라서 임금이 하는 정치에 대하여 잘못한 부분에 대해 널리 의견을 구하는 ‘구언교(求言敎)’가 내려졌고 여기에 대한 응답이 순창군수 김정, 담양부사 박상, 무안현감 유옥 등의 ‘신비복위상소’입니다. 도암 이재 선생이 지은 삼인대 비문의 내용을 살펴볼까요?

▲절의탑.

“강천사 남쪽에 이른바 삼인대가 있으니 높이가 수십 길이나 되고 아래로 굽어보면 깊은 연못이 있으며, 그 위에는 몇 그루의 소나무가 바위틈에 서 있는데 몇 백 년이나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삼인이란 무엇인가? 옛날에 순창군수였던 충암(冲庵) 김정 선생과 담양부사였던 눌재(訥齋) 박상선생, 그리고 무안현감이던 석헌(石軒) 유옥 선생이 이곳에 모여서 신씨 복위 상소를 의논하였다. 삼현은 각자 관인을 나무에 걸고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할 것을 결의하였으므로 삼인대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또한 삼인의 기절을 “강천(剛泉)의 맑은 물은 동쪽으로 우렁차게 흘러가고,  온릉의 울창한 나무는 북쪽을 바라보며 푸르고 푸르네,  비석은 닳아 없어질 수 있겠으나 선생들의 이름은 끝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썼는데 바로 '목숨을 걸고 할 말은 한다'는 조선 사림정신의 바탕이자 본보기가 되었답니다. 상소의 내용은 너무 많아 모두 말할 순 없고 <순창군지> 등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극형과 엄벌에 처하자는 공신들에 맞서 정암 조광조 등이 언로를 막을 순 없다 하여 박상은 남평에, 김정은 보은으로 유배를 떠나게 됩니다. 왜 유옥 선생이 빠졌냐고요. 세 명이 결의를 했지만 두 분이 유옥 선생은 외아들이라 상소문에서는 이름을 뺐다고 합니다.
거창 신씨는 영조 15년이 되서야 복위 됩니다. 220년만의 일이죠. 1739년 조선 역사상 비운의 왕비로 기록되어 있던 거창신씨는 단경(端敬)왕후로 복위하고 순창군수 김정과 담양부사 박상에게도 증지와 증시가 내려지고 그 자손에게 시혜를 베풀도록 합니다. 단경왕후가 묻힌 무덤도 ‘온릉(溫陵)’이라 정해지고 5년 뒤 순창에는 삼인의 사적을 기리는 삼인대 비가 세워지는 거지요. <조선환여승람> ‘순창군 지리부 누정-삼인대’에는 “영조가 글을 짓되 ‘하늘은 높고 높아 굽히지도 펴지도 않는다’하셨으며 정조는 ‘삼인대는 만고에 닳지 않는다’하시고 산판 145정을 사패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지요.
매년 음력 7월 29일을 기해 삼인문화선양회가 주관하여 삼인 문화 축제가 열리는데 세 분의 충(忠)ㆍ효(孝)ㆍ예(禮)의 절의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려 노력하고 있지요.
수피가 아름다운 330년이 넘은 모과나무가 보이죠. 못생긴 모과 몇 알에서 풍기는 향기가 온 마을을 덮는다고 어떤 수필가가 썼는데요. 저기 냇가까지 펼쳐진 가지에도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는 우아하고 당당한 나무입니다. 모과를 보면 세 번 놀란다고 하지요. 한번은 저처럼 너무 못생겨서, 둘째는 못생겼는데 향기가 너무 좋아서, 세 번째는 향기로운데 너무 뜹뜰해서 놀란다고 하네요. 한 번 더 놀라세요. 모과나무에 작지만 품위가 넘치는 연분홍꽃이 필 때인데 제가 단언하건데 꼭 보러 오시기 바랍니다. 삼인대의 선비정신이 배어있어 그런지 겁나게, 허벌 나게, 오지게, 거시기 허게 이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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