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남ㆍ박정균 씨 수제화 '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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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남ㆍ박정균 씨 수제화 '장인'
  • 조남훈 기자
  • 승인 2017.03.15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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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 만지며 사람의 삶을 더듬다’

맞춤 구두는 발 편하고 내구성 좋아
구두는 꼭 신어보고 사야 후회 없어
정년 없는 직업 …기술 전수 하고파

 

▲손병남 씨의 구둣방에는 수선을 마치거나 손길을 기다리는 구두가 많다. 50년 동안 구두를 만진 손 씨는 지금은 구두 만드는 일을 멈췄지만 몸에 밴 기술로 구두를 수선한다.
맞춤복장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멋은 신발에서 결정된다. 옷을 말끔히 차려입고 집을 나설 때 신발의 감촉이 좋으면 기분 좋은 하루를 예고한다. 하늘이 비칠 정도로 빛나는 구두코는 누구에게나 환심을 사기 충분하다.
사람의 무게, 그리고 삶을 지탱하는 신발은 걷기 시작해 죽을 때까지 우리 몸의 일부나 마찬가지다. 신발 종류가 워낙 많아진 지금은 누구나 마음에 드는 신발을 골라 신을 수 있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신발은 곧 신분의 상징이었고 그중에서도 구두는 부유하거나 신분이 높은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구두가 일반 신발이 된 때는 불과 40~50년 전으로 국내에서는 그 역사가 짧다.
구두 가격은 소재, 업체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싸고 좋은 구두는 많지 않다. 사람들은 좋은 구두를 신기 위해 장인을 찾았다. 수제화 기술자는 요즘은 거의 볼 수 없는데 순창에는 한 때 수제화로 이름을 날린 사람들이 있다. 지금은 구두 만드는 망치질은 멈췄지만 여전히 구두를 만지며 살고 있는 두 명의 수제화 전문가가 있다. 읍내 중앙로 중앙회관 앞에서 구두수선을 하는 손병남(65ㆍ순창읍 순화)씨와 공용터미널에서 같은 일을 하는 박정균(64ㆍ순창읍 순화) 씨다. 두 사람은 50년 전부터 구두를 만들어온 수제화의 산 증인이다. 나이는 손 씨가 한 살 많지만 두 사람은 한동네에서 나고 같이 놀며 자란 깨복쟁이 친구사이다.
손 씨가 작업하는 2평 남짓한 공간에는 수선을 마치고 한껏 광을 낸 구두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외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3대째 구두를 만들었다. 손씨의 외할아버지는 기술을 전수해줄 새 없이 일찍 작고했고 손 씨의 아버지인 사위가 기술을 익혀 광주시 금남로에서 양화점을 열었다. 손 씨의 아버지는 1965년도 쯤 순창읍내 당시 순창군농협 앞 순창병원 옆에 럭키양화점을 개업했고 손 씨에게 이어져 캐리부룩 양화점이 됐다. 손 씨는 16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구두기술을 익혔다. 박 씨 역시 아버지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아 경원미장원 근처에서 신창양화점을 운영했다.
두 사람이 하던 양화점은 비교적 잘 됐다. 손 씨는 “9살 되던 해에 광주에서 순창으로 넘어왔다. 1965년 정도만 해도 구두 한 켤레가 쌀 한가마니 값을 넘었다. 주로 있는 집 사람들이 맞춰 신었다. 구두를 맞춰 신고 장가갈 형편이 못되는 사람은 빌려 신고 결혼식을 치뤘다”고 회상했다. 박 씨는 “아버지가 처음 구둣가게를 할 때는 고관대작들이 고객이었지만 내가 운영할 때는 구두가 보편화됐었다. 자녀와 사위들이 아버지나 장인어른을 모시고 와 맞춤신발을 선물하는 일이 많았고 여성들이 고모를 모시고 오기도 했다. 결혼하는 자녀들이 부모님께 양복과 시계, 구두 등 복장을 맞춰드리는 일이 흔했다”고 말했다.
수제화는 제작공정이 매우 까다롭다. 손 씨는 “발 치수를 측정하고 골 균형에 맞게 잰 뒤 백지에 그림을 그렸다. 볼과 발등 높이까지 치수를 재고나면 가죽재단을 하러 광주에 갔다. 가죽을 잘라 미싱을 하고 그것을 가져와서 바닥을 붙이며 마감을 했다. 당시에는 미싱도 흔치 않던 시절이라 광주에서 작업을 해야 했다”고 설명했다. 반제품을 가져온 뒤 하는 일은 온전히 구두 장인들의 일이다. 실수로 흠집이라도 나면 다시 광주에서 가죽을 재단하고 박음질을 해서 가져와야 했기에 손해가 컸다.
이들이 만든 구두는 내구성이 좋아 좀처럼 상하지 않았다. 손 씨는 “속에 가죽을 덧대고 찹쌀풀을 끓여 가죽에 입힌 뒤 햇볕에 이틀을 말리면 요즘 나오는 안전화 저리가라 할 정도로 단단했다. 바닥과 가죽을 이을 때는 삼실(삼베로 만든 실)을 썼다. 송진과 미싱 기름을 함께 끓여서 삼실에 문질러 입히면 실이 부드러워지고 질긴데다 십년이 넘도록 안 썩는다. 창갈이 할 때 실을 빼면 그대로 나온다”며 “양화점을 접고 객지에 나갔다가 16년 만에 다시 왔는데 창갈이 하러 온 신발을 보니 내가 만든 신발이었다. 그대로 있는 실을 보며 느낌이 참 새로웠다”고 말했다.
▲기성화에 밀려 구둣가게를 접고 터미널에서 구두 수선과 미화작업을 하는 박정균 씨는 요즘은 잠시 산불감시요원으로 일하고 있다.
수제화가 오래가는 것은 처음부터 싣는 사람의 발에 맞춰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발이 편안하고, 광만 내면 여전히 제 기능을 다 하는 구두에 정이 든 사람들은 고쳐서 신었다. 수제화의 내구성은 인조가죽에 본드를 칠해 만든 공장 구두에 비할 바가 아니다. 여기서 구두 제작자는 고민에 빠진다. 신발의 수명이 길면 일감이 줄어들고 소득감소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수제화의 자리를 빠르게 꿰어 찬 기성화는 두 사람이 연장을 놓도록 했다. 박 씨는 현재 구두 만지는 일을 잠시 놓고 산불감시요원으로 일하고 있다.
평생 구두를 만들며 살아온 두 사람은 어느 구두를 보던 한눈에 공장표인지 수제화인지, 고급가죽인지 아닌지를 구분한다. 이들은 “구두는 가격에 따라 재료가 달라지기 때문에 비싼 건 그만큼 값어치를 한다. 인조가죽은 내구성이 형편없다”며 “구두는 홈쇼핑에서 사면 절대 안 되고 직접 보고 발에 맞는 것을 신어야 한다. 특히 여성용은 굽의 높이에 따라 균형이 달라지고 골 깎는 것에 따라 달라진다. 골이 맞지 않으면 가운데부터 터져 나온다. 앞이 뜨지 않고 차분히 바닥과 닿는 구두가 좋은 구두”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구두는 좌우간 깨끗이 신어야 한다. 약을 가끔 칠해줘야 부드러운 질감을 유지한다. 기름이 마르면 가죽이 빳빳해져 신발에 좋지 않다”고 알려줬다.
두 사람은 지금 구두를 만들지는 않지만 기술이 몸에 배어있다. 손 씨는 구두를 배우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기술을 알려줄 계획이다. 그는 “힘든 일이지만 나는 놀이터 삼고 있다. 구두 닦으며 여러 사람과 얘기를 나누니 사니 재미가 있다. 농사일 하는 친구들을 보면 농사를 끝내면 하루를 보내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백수도 아무나 못한다”며 “57~58세에는 인생을 정리할 줄 알아야 한다. 줄 것, 받을 것 없으면 마음이 편하고 스트레스가 없다”며 환한 표정이었다. 구두뿐만 아니라 구두를 신었던 사람들의 사연까지도 보듬으려는 그들의 구둣방은 그래서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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