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내수 씨, ‘백양세탁소’ 52년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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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내수 씨, ‘백양세탁소’ 52년 운영
  • 조남훈 기자
  • 승인 2017.04.05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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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살 부터 세탁 일하며 기술 배운‘전문가’

▲박내수 씨가 52년 동안 운영해온 세탁소는 군내에서 가장 오래됐다. 세탁소에 들어오는 옷들은 당시 유행이 반영됐다. 인구가 줄고 고령화 됐지만 백양세탁소에는 개업손님이 지금도 드나들고 있다.

깔끔한 옷처럼 기분 좋은 ‘명품세탁소’ … 기전마을 민원실
교복ㆍ맞춤복ㆍ기성복 변천따라, 물빨래ㆍ드라이ㆍ수선까지
단골손님과 함께 늙어가지만 알차게 살아온 인생에 ‘자부심’

드나드는 손님이 있어야 운영되는 상점의 변화는 시대를 반영한다. 장사 잘 되던 가게가 어느 순간 문을 닫고, 새로 들어선 가게가 잘 되기를 반복하면 그 자리는 명당이 된다. 때로는 개발에 의해 가게를 부득이 옮기는 경우도 있다. 도시에 비해 변화가 적은 농촌에서도 세월을 돌아보면 참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경기에 민감하지 않는 업종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세탁소가 있다. 집에서 세탁하기 어렵거나 특별한 세탁이 필요한 옷은 세탁소를 거친다. 증기가 모락모락 피어나오는 세탁소를 거치면 헌옷이 새 옷이 되는 마법을 경험한다. 순창읍에서 백양세탁소를 운영하는 박내수(77ㆍ순창읍 남계) 씨는 50년 넘게 옷을 만져온 뼛속까지 세탁기술자이다.
그는 19살 때부터 지금까지 세탁물을 받아왔다. 당시 순창읍 일광세탁소에서 일하며 기술을 배운 박 씨는 대전에서 2년가량 세탁 일을 하다 군대를 다녀온 뒤 바로 세탁소를 개업해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1965년 5월 8일이 세탁소 개업일이니 올해로 52년째다.

▲개업 전부터 박내수 씨가 쓴 일기장.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일기장은 박 씨가 부지런하고도 알차게 살아왔다는 증거다.
세탁소 개업 초기 세탁물은 교복이 주류였다. 그는 “당시는 떨어지게 돼있던 교복 칼라(목 주위에 둘려지는 옷깃)에 풀을 먹여 다렸다. 깔끔하게 입고 다니는 게 유행이었고 특히 옷깃(칼라)을 반듯하게 하려는 학생들이 옷을 맡겼다. 지금은 기성복이 많지만 당시에는 맞춤복이 많았다. 의복이 지금처럼 고급스럽지 않았고 정장이 주로 들어왔다. 지금은 옷감이 튼튼해졌는데 그 때는 천이 부실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손님들이 맡긴 옷을 정성껏 다뤘다. 멀리 임실 강진에서도 왔다. 셀 수 없이 많은 손님 중에 그가 기억하는 특별한 손님은 임실 사람이다. 그는 “강진에 사시는 체구가 작고 항상 말끔하게 차려입은 할아버지가 항상 우리 집을 다녔다. 순창에 세탁소 여러 곳을 다녀 봤는데 우리 집이 가장 낫다고 하시니 기분이 좋았다. 그 분은 나중에 본인이 입을 옷 두 벌만 남기고 주변사람들에게 옷을 다 나눠줬다. 산 사람 옷은 입어도 죽은 사람은 옷은 안 입으니 미리 나눠 준다고 하셨다. 그리고 얼마 뒤에 돌아가셨다. 가실 때를 아는 분 같았다”고 소개했다.
예나 지금이나 다루기 쉽지 않은 옷감이 ‘순모’다. 세탁을 하면 줄어드는 바람에 고생했던 사람들은 변형을 피하고자 세탁소를 찾았다. 세탁기가 좋아진 지금도 한복이나 정장 등 고급의류는 세탁소를 거친다. 기성복 시장이 커지면서 세탁물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그는 “옷 관리는 습도가 가장 중요하다. 좀을 막으려면 옷에 당분이 묻어있지 않도록 깨끗이 해야 한다. 한복은 한 번 입으면 반드시 세탁해야 한다. 황변이 오면 빼기가 어렵고 빠지더라도 옷감이 손상된다. 세탁소에서도 약품을 쓰기 전에 보이지 않는 옷감에 실험을 해보는 등 나름의 노력을 한다”고 설명했다. 
그가 경험한 세탁소 전성기는 군내 인구가 가장 많았던 때와 일치한다. 사람이 많으니 일감도 많았다. 박씨는 “지금은 세탁소 자체가 줄었다. 고령화 되니 옷도 덜 입는다. 세탁소 일이 큰 파도를 타는 일은 아니고 사람이 하는 일이다. 노동력에 기술을 요하는 일인데 수입은 적으니 지금은 배우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9남매 중 장남인 그는 남들과 같이 놀 수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더욱 어깨가 무거워진 그는 한복 바지를 잘 만들던 어머니와 함께 세탁소 일에 몰두했다. “신발 두 켤레 있을 때(신혼일 때) 열심히 벌라고 하는데 나는 10켤레를 놓고 시작해서 많이 힘들었다.”
그는 세탁소 일을 하면서도 시간을 내서 동생과 함께 유선방송(라디오)을 설치하는 일도 했다. 그의 부인은 남편의 일을 거들면서 어린 시동생들을 보살펴야 했다. 어려운 시기를 꿋꿋이 이겨낸 그는 딸을 치과의사로 키워냈다.
그가 옷 수선을 시작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부라더 미싱(재봉틀)이 혼수품이던 시절에는 세탁소에 수선 맡길 일이 없었다. 그러다 옷 수선 수요가 점차 늘어나면서 그도 미싱을 배웠다. 지금은 일반 수선은 물론 지그재그나 오버로크까지 한다. 그는 지난 1992년 세탁소 국가 기술자격제도가 생기자마자 공부해서 자격증을 땄다. 세탁소를 차린지 27년이 지난 뒤였다. 그런데 자격증이 있으나 없으나 세탁소는 누구나 서류만 내면 할 수 있다. 자격증을 땄다고 딱히 혜택을 본 것도 없다. 하지만 그는 “개업손님과 함께 늙어간” 지난 세월을 알차게 살아왔다는 점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새집식당 앞에 있던 첫 가게는 지금 길이 돼 없어졌고 점포를 옮기기 반복하다 1989년부터 지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사이 그는 11년차 기전2마을 이장이 됐다. 따라서 백양세탁소는 옷을 맡기고 찾는 손님뿐만 아니라 동네 주민이 드나드는 마을 민원실이다.
상점을 지탱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긴 세월 동안 그 자리를 지키는 상점에는 사람이 드나들며 생긴 수많은 사연이 있다. 박내수 씨의 백양세탁소는 단골 많은 가게가 오래 간다는 진리를 일깨워준다. 나올 때 기분 좋은 가게인 백양세탁소가 앞으로도 계속 자리를 지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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