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보물여행(20) 한평생 절개 지킨 ‘간아지’ 기린 ‘정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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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보물여행(20) 한평생 절개 지킨 ‘간아지’ 기린 ‘정려비’
  • 김태현 해설사
  • 승인 2017.06.22 1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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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떠나는 ‘순창보물여행’
순창등기소 앞 외진 곳에 ‘자리’…1514년 중종 9년에 세워진 비석

 

▲훈도 유문표의 첩이자 관비였던 절개 있는 간아지를 기리는 비석 ‘간아지 정려비’는 순창등기소 앞 외진 곳에 자리해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순창에 있는 재미있는 역사 유적을 하나 소개해드리려 합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덕목으로는 군신 간에는 충, 부자 간에는 효와 함께 남녀 간에 중시 되었던 덕목은 다름 아닌 절입니다. 국가에서는 이런 덕목을 장려하기 위해 충신 효자 열녀 절부 등에 정려비를 내려 본보기로 삼고 그 뜻을 칭송하기도 하였습니다.
순창에도 이전에 소개드린바 있었던 한 집안을 일으켜 세운 구미마을의 이씨 할머니의 뜻을 기리는 직제학양수생처열부이씨지려와 같이 많은 정려비가 있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정려비는 ‘절부고훈도유문표첩관비간아지 정려비’입니다. 이 정려비는 순창 등기소 앞 전광판 뒤편에 외진 곳에 조용히 서있어 오가는 사람의 시선을 많이 받고 있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이 정려비가 여기까지 오는데 많은 풍상이 있었는데요. 그 이야기와 절부 간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드리려 합니다.
보이는 바로 이 비석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인 간아지 정려비입니다. 간아지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잠시 후로 미루고요, 이 비석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비석은 많이 낡고 글자도 자세히 보아야 보일 정도로 많이 닳아 있습니다. 비석의 앞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습니다.

 

“節婦故訓導柳文杓接官婢干阿之之閭”
 절부고훈도유문표첩관비간아지지려

뒤편에 보시면 “正德九年六月日(정덕구년육월)” 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먼저 앞면의 내용은 돌아가신 선생님인 훈도 유문표의 첩이자 관비였던 절개 있는 간아지를 기리는 비석이라는 의미이고, 이 비석을 세운 시기는 ‘正德’ 정덕은 명나라 무종 때의 연호로 서기로는 정덕 1년이 1506년에 해당되며 이 해에 중종이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는 해입니다. 그러니 정덕 9년이니 1514년이 되고 바로 중종 9년에 이 비석이 세워 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먼저 앞면에 유문표라는 인물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훈도라는 직함은 정9품으로 지금의 선생님이며, 지방 향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직업을 의미하는데 산학훈도, 율학훈도, 한학훈도 등 지금의 회계 법학 그리고 천문 지리 및 외국어 등을 가르치는 직업이었다고 합니다.
유문표라는 인물이 언제 순창에 근무하였는지는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아마도 40대 후반 정도로 추정됩니다. 이때 관비 간아지를 만난 것으로 생각되며 훈도는 900일을 근무하면 다른 지역으로 전임된다고 하니 아마도 40후반에서 50대 초에 순창을 뜬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때부터 간아지의 이야기가 시작되는데요, 간아지는 유문표가 순창을 뜬 시점부터 일편단심 그 만을 생각하며 정절을 지키다가 유문표가 죽자(정확한 연도는 현재로써는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 3년간 얼굴을 꾸미지 않고 상복을 입고 생활하였고, 그 이후 주변의 개가 종용 등의 등쌀을 피해 유문표의 본체 담양 어그실 마을로 들어가 한평생 정절을 지키며 살았다고 합니다.
담양 어그실 마을은 유문표의 처가로 성주 현씨 집안인데, 저는 개인적으로는 과연 본처 가문에서는 간아지를 어떻게 대우했는지 자못 궁금합니다. 국가에서는 정려비까지 내려 그 정절을 칭송한 인물이었으나 개인의 감정까지 국가에서 통제할 수는 없는지라 성주 현씨와 간아지의 관계는 과연 어떠했을까요? 
유문표의 행적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어 다시 유문표를 만났는지의 여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만, 아마도 만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런 간아지의 정절을 기리며 1514년 여러분이 지금 보고 계시는 정려비가 내려지게 된 것입니다. 본 정려비는 순창 경천변의 한 교각 옆에 세워졌다가 한 차례 유실되어 순창 금과면의 유씨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담양의 어그실 마을로 옮겨졌고 2000년 11월 다시 이 위치에 모셔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본 정려비에 대한 설명은 이것으로 다 드렸습니다.
제가 제일 처음 이 비를 소개해드리면서 재미있는 역사 유적이라고 표현을 했는데요, 재미있다고 표현한 이유는 간아지에 대한 평가가 성별에 따라 매우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남성은 이런 간아지에 대한 정절을 칭송하는 편이고 여성은 간아지의 정절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우월적 지위에 있었던 남성은 과거에 영화에 머무르려는 경향이 있고 그 반대였던 여성은 주어진 차별을 부정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과거의 사건 또는 일을 평가할 때는 현재의 가치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눈으로 평가하는 것이 그 사물 또는 사건이 가지는 의의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지금의 사고로 간아지를 평가하자면 간아지는 당연히 말도 안 되는 화석과도 같은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 시대 즉, 조선시대의 가치가 충과 효 또 열을 국시로 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임금이 직접 정려비까지 내려 그 뜻을 기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간아지의 이야기를 통해 모습은 시대에 맞게 변해가나 지금 이 시대에도 살아있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변하지 않는 사랑과 섬김 또 의리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의의 있는 일이 될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잘 알고 있는 대로 순창에는 절의를 상징하는 대표적 유적인 삼인대를 비롯하여 다양한 정려비가 있어 순창 사람들의 충, 효, 절의 정신을 기리고 있습니다. 순창의 정절 의 정신도 순창고추장과 같이 잘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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