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보물여행(23) 쌍치 피노 전봉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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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보물여행(23) 쌍치 피노 전봉준관
  • 황호숙 해설사
  • 승인 2017.08.10 13: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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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떠나는 ‘순창보물여행’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쌍치면 피노리에 위치한 녹두장군 전봉준관.

쌍치면 피노리를 아시나요? 첩첩산중 꼭대기에 움푹 들어선 분지 모양으로 자리 잡고 있는 피노리는 조선시대 당쟁에서 밀린 소론들이 노론들을 피해 이곳에 정착했다고 이름 붙인 곳입니다. 녹두 전봉준 장군이 붙잡힌 곳이라 더욱 유명하지요. 오척 일촌의 키와 아흔근 무게의 몸으로 척양척왜 보국안민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120년 전의 영웅이 어떻게 살았고 여기서 잡히게 되었는지 술술 이야기를 풀어 볼까요.
전봉준관에 가면 백산 봉기에서 창의문을 선포하고 있는 동상이 있습니다. 120년 전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짐작이 가나요? 혹시 이런 노래 들어 보셨는지요. “가보세, 가보세 병신되면 못하리 /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 가리”
1894년 갑오년에 이어진 을미년, 병신년 언간에 혁명을 이루어야 한다는 굉장한 뜻을 가진 민중들의 노래였죠. 당시 백성들에게 사람은 누구나 한울님이고 마음속에 한울님을 모셨다는 동학의 깨우침은 머리를 후려치고 새 하늘이 열리는 개벽이었을 겁니다. 지배자들에겐 어린 싹부터 밟아 죽여야 할 불온사상이었겠죠. 1894년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던 흰 옷 입은 조선의 백성들이 대장으로 삼은 사람이 전라도 말로 ‘솔찬히 아고똥험서도 징허게 눈이 부리부리헌’ 녹두장군입니다.
정읍 말목장터에서 봉기한 농민군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자 잠시 회유정책을 편 후 다시 농민들을 탄압합니다. 그래서 1894년 5월 4일 고부군 백산면에 다시 모입니다. 그 수가 얼마나 많았던지 사람들이 서면 온통 산이 흰색으로 뒤덮이고 앉으면 들고 있는 죽창이 솟아 죽산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답니다. 상상 해보세요.
“우리가 의를 들어 여기에 이름은 그 본의가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백성을 도탄에서 건지며 국가를 반석 위에 두고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강적의 무리를 몰아내고자 함이다. 양반과 부호에게 고통 받는 백성과 방백과 수령 밑에서 굴욕을 당하는 소리(小吏)는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라,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놓치면 후회해도 미치지 못하리라.”
동학농민혁명은 격동하던 19세기 말 반침략, 반봉건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일어난 농민들의 크나큰 한 판 싸움이었습니다. 농민들 수십 만 명이 피 흘리고 쓰러져간 처절한 역사지만 이후 의병투쟁, 독립투쟁으로 이어지며 우리 근현대사에 위대한 뿌리가 되었지요.

 

 

▲전봉준 절명시(絶命詩) 48×24cm 목판화 2014 / 소래 박홍규 작.


‘새야새야 파랑새야’라는 노래를 아시나요. 녹두장군을 그리며 백성들이 불렀던 노래입니다. 혁명 당시 조선 인구 1050만명 가운데 4분의 1인 200만∼300만명이 동학에 참여했고 이 중 30만명이 희생됐다고 합니다. 왜냐고요. 일본놈들의 최신 기관총과 농민들의 죽창은 비교가 안 되는 화력 싸움입니다. 우금치 전투와 그 이후 전투에서 무참하게 학살당하는 백성들을 보며 피눈물을 흘렸던 녹두장군은 한양의 정세를 관망한 후 다시 일어서려고 관군의 추격을 따돌리며 정읍의 입암산성과 백양사를 거쳐 피노리에 도착 합니다.
혹시 ‘서찰을 전하는 아이’라는 역사동화 보셨나요. 보부상의 아들인 한 아이가 녹두 장군에게 보낼 서찰의 내용은 ‘오호피노리경천 매녹두’, 즉 ‘슬프구나. 피노리에서 경천이 녹두장군 전봉준을 정부에 팔아 돈을 번다’였습니다. 또한 ‘장래 백만대중의 우두머리가 되어 천하에 이름을 떨치게 될 것이나 경천(京川)을 조심하라’는 점괘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공주 우금치 패전 이후 남하할 때 충청도의 경천(京川)이란 시냇가가 넘으며 안심했는데, 그것이 사람 김경천을 말하는 것인지를 몰랐다 합니다. 피노리 뒷산이 계룡산이고 밀고한 사람이 김경천이었거든요. 우금치로 향하던 고개가 무너미재였는데 이곳 지명에도 무너미재가 있다 합니다.
당시 녹두장군에게는 원하는 군의 군수 자리와 현상금 천냥이 걸려 있었다죠. 120년전 12월 2일 그 추운 날 따뜻한 국밥 한 그릇 못 먹고 김경천에 의해 밀고 되어서 정강이가 부러지게 몰매를 맞았다는 곳이 여깁니다. 회문산 주위를 돌아 피투성이가 된 채 한양으로 압송되고 사형당하는 18일간의 이야기가 한승원의 소설 ‘겨울잠, 봄꿈’에 나와 있습니다. 공초와 회유 기록이 쓰여 있는데 압권은 교수대에 올라갈 때 가족에게 남길 말을 묻자 “나는 다른 말은 없다.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가는 사람들에게 내 피를 뿌려주는 것이 옳거늘 어찌 컴컴한 적굴 속에서 암연히 죽이느냐”며 죽음 앞에서도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너희는 나의 적이요, 나는 너의 적이라. 내 너희를 쳐 없애고 나랏일을 바로잡으려다가 도리어 너의 손에 잡혔으니 너희는 나를 죽일 뿐이요, 다른 말은 묻지 말라. 내 적의 손에 죽기는 할지언정 적의 법은 받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죠. 또 일본의 구명 유혹에도 “이때에 와서 어찌 그러한 비열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죽음을 기다린 지 오래되었다”

우리들을 숙연하게 하는 전봉준 장군을 만나면서 아무쪼록 당찬 여행의 기쁨 맛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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