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묘편시/ 지나친 복수로 또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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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묘편시/ 지나친 복수로 또 다른
  • 정문섭 박사
  • 승인 2017.08.17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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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낼 굴 掘 무덤 묘 墓 채찍 편 鞭 주검 시 屍
정문섭이 풀어 쓴 중국의 고사성어 159

논문심사를 마친 늦은 봄, 필자는 아내와 함께 지도교수였던 Zao교수 부부를 모시고 저녁을 같이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좀 밝지 못하고 무슨 근심이 있는 것 같아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는 대답대신 쓴웃음만 지었다. 민망해진 부인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얘기는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답니다. 당시 Zao교수의 부친은 장관급 고위직에 계셨지만 류사오치(유소기)와 덩샤오핑(등소평) 쪽에 있었던 관계로 파직을 당하고 가택연금이 되었답니다. 그 후 류사오치가 1969년 옥중사망을 하자 갑자기 홍위병들이 아버지를 끌어내어 인민재판에 올려 결국 옥에 가두었습니다. 결국 고문을 많이 당하여 그 후유증으로 1977년 봄에 돌아가셨답니다. 근데 그분이 돌아가시면서 아들인 Zao교수에게 ‘나를 고발하여 죽인 놈이 ’Fang모모‘이니 잊지 마라.’며 유언을 남기셨답니다. 그 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엊그제 어떤 학생을 만나고 나서 저렇게 울상을 짓고 다닙니다.”
“아니 그 학생하고 무슨 관련이라도 있단 말입니까?“
결국 Zao교수가 입을 열었다.“
“아이고! 결국 중국 사람들에게는 말 못하는 것을 외국인에게 먼저 말하게 되네요. 내 제자 중 성이 Fang인 학생이 엊그제 나를 찾아 왔습니다.”
“아! 그 키가 작고 눈이 크고 또랑또랑한 석사 졸업생 말입니까? 미국으로 유학 간다고 들었는데….”
“그런데 그 학생의 추천서를 쓰던 중 인적사항을 보다가 깜짝 놀라 서류를 떨어뜨렸습니다. 그의 할아버지가 바로 아버지가 유언하신 바로 Fang모모였던 것입니다.” 
“아! 어찌 이런 일이. 교수님, 어찌 하실 작정이십니까?”
“나도 모르겠습니다. 그간 우수한 제자로 여겨 잘 챙겨 주어왔는데…, 옛적이라면 오자서伍子胥)처럼 굴묘편시라도 하겠지만, 이 대명천지에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고, 스승이며 학자로써 못 써주겠다고 말하는 것도…, 참으로 난감합니다.  
오자서는 중국 춘추시대 6대에 걸쳐 초(楚)나라에 충성을 바친 전통을 자랑하는 가문이었다.
그의 아버지 오사(伍奢)가 태자의 태부를 지냈다. 평왕이 비무기(費無忌)에게 태자비를 맞아들이기 위해 진(秦)에 보냈는데, 비무기가 진의 공주가 너무나 예쁜 것을 보고 말을 달려 돌아와 평왕에게 보고했다.
“진의 공주가 절세미인입니다. 아예 왕의 비로 삼으시고 다른 여자를 태자비로 맞아 주는 게 좋겠습니다.”
왕이 진 공주를 비로 삼아 총애하여 아들 진(軫)을 낳았다. 그 후 비무기는 나중에 태자가 왕위를 계승할 경우 자기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임을 알아차리고 태자를 참소하였다. 평왕이 이에 대해 오사에게 물었다.    “왕께서는 어찌 간신의 말을 듣고 골육의 정을 멀리하시려 합니까?”
다급해진 비무기가 왕에게 다시 태자와 오사에게 누명을 씌웠다.  
“오사가 태자를 도와 반란을 일으켰으니 바로 오사를 죽여야 합니다.”    결국 태자가 송나라로 도망가고 오사와 큰 아들 오상이 잡혀 죽었다.  둘째인 오자서만 가까스로 오(吳)나라로 도망쳤다.
우여곡절 끝에 오왕 합려(闔閭)의 신임을 얻은 오자서가 여러 차례 초나라를 쳐 마침내 초의 도읍에 입성하였다. 오자서가 소왕(昭王 ; 평왕의 아들)을 잡으려고 했지만 소왕이 탈출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대신 이미 오래전에 죽은 평왕의 무덤을 찾아내 파헤치고 그 시체를 꺼내 3백 번 매질했다.
지난 날 오자서가 초나라에 있을 때 친구로 지냈던 신포서(申包胥)가 산으로 도망쳤다가 오자서의 행위를 듣고 사람을 보내 이렇게 꾸짖었다. 
“복수의 방법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천리에 어긋난 것이다.”
오자서가 대답했다. 
“그에게 전해라. 나는 해는 지고 갈 길은 멀기(日暮途遠일모도원) 때문에 갈팡질팡 걸어가며(倒行逆施도행역시) 앞뒤를 분간할 겨를이 없구나.”  
훗날 오자서는 합려가 죽은 후에, 그 뒤를 이은 부차(夫差)와 틈이 벌어져 부차가 내린 칼로 결국 자결하게 된다. 신포서는 진(秦)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여 초나라를 살렸다.

이 이야기는《사기》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에 나온다. 오자서가 평왕의 무덤을 파 시체에 매질을 한 이야기에서 이 성어가 유래하여 통쾌한 복수를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신포서의 말대로 아무리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라도 지나친 복수를 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는 의미도 갖게 되었다.
  이 고사의 끝에 나오는 ‘일모도원(日暮途遠)’은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 즉,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이 없음을 비유하는 성어가 되었다. ‘도행역시(倒行逆施)’는 차례를 거슬러서 행한다는 뜻으로 사리에 어긋나게 행동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 되었다.

앞서 말한 Zao교수의 예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1966년부터 벌어진 10년간의 문화대혁명은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잠시 물러난 마오쩌둥이 자신의 재부상을 위해 프롤레타리아 민중과 학생폭력운동을 동원해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등 시장회생파를 공격하고 죽이려고 몰아간 현대 중국사의 크나큰 과오이며 오점이었다. 중국의 모든 것을 퇴보시키고 정체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박해받고 또 죽임을 당했다.
이미 40여년이 지났지만 중국정부는 당시의 과오에 대해 이렇다 할 진상조사니 평가 등을 애써 외면하고 금기시하고 있다. 표면화될 경우 피해자와 가해자 간 굴묘편시가 성행하고, 이로 인해 백성들 간 분열이 일어나 걷잡을 수 없는 격랑에 휩싸이고 복수가 또 다른 보복으로 이어져 급기야 나라가 깨질 수도 있는 헤비급 핵폭탄이기 때문이다. 
정권교체가 이뤄질 때마다 전임자의 과오를 드러내어 법의 심판을 받게 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당하는 자들은 정치적 보복이니 뭐니 하며 비난을 한다. 물론 권력을 쥐었다 해서 과도하게 휘둘러 정치적 보복의 냄새가 나서는 안 되겠지만, 명명백백히 불법을 저질러 놓고도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파렴치한들이 있어서도 안 될 일이다. 나라의 정치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또 국민들을 위하여 정치를 한다면, 정말 객관적인 잣대로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전임자의 과오가 있다면 엄벌해야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차후에 정권을 잡은 자들이 전횡하지 않고 오로지 나라와 국민을 위해 권력을 행사하여 훌륭한 정치를 펴게 된다면 더 말할 나위 없이 좋겠다.

글 : 정문섭 박사
     적성 고원 출신
     육군사관학교 31기
     중국농업대 박사
     전) 농식품부 고위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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