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서서(21)/ 어느 형에 대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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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에서서(21)/ 어느 형에 대한 추억
  • 선산곡
  • 승인 2018.01.04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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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형이 탁구경기를 하고 있었다. 학교를 대표하는 선수 실력이었다. 사람들이 주변에 모여 그 경기를 구경하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탁구공 가장자리를 엄지로 눌러 회전을 일으켜 보내니 공이 구르다가 되돌아왔다. 경기 중 네트에 걸려 내 앞으로 흘러온 공을 형에게 건넨다며 내가 짧게 친 장난이었다. 다시 굴려준 공을 라켓을 든 형이 집었다. 구경하는 많은 사람들 틈에 선 내게 공을 집으며 보냈던 미소. 그 장난을 미소로 화답했던 형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까까머리 중학1학년생 때였다.
짧았던 서울에서의 반거충이 시절이었다. 대학생이었던 그 형과 만나기로 약속했던 날은 햇살이 짱짱한 초여름이었다. 만나기로 한 고려대학교 정문에 도착하자마자 형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 난 쪽을 보니 도로건너편 4층 건물옥상 위에 흰 옷을 입은 형의 모습이 보였다. 그 공간의 차이, 형은 건물 위에서 화사하게 웃으며 내 이름을 불렀다. 실은 웃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거리였지만 나는 형이 그렇게 웃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평소 조용하고 신비스런 이미지를 가진 형이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것이 그저 좋았을 뿐이었다. 아마도 나는 친구보다도 그 형을 더 좋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날 대한극장에서 형과 함께 본 영화는 윌리엄 홀든과 제니퍼 존스가 주연한 「모정(慕情)」이었다.  ‘Loves Is A Many Splendored Thing. 사랑은 아름다워라’의 주제가와, 여자 주인공이 울음을 터뜨리며 엎드려 우는 마지막장면이 인상적인 영화였다. 그 단 한 번의 동행에 형은 시종일관 침착하면서도 다정했고, 나는 거기에 맞게 조용히 그 뒤를 따라다녔다. 형이 나를 위해 시간을 내주었다는 것은 자작시 한 편 내게 살며시 건네 준 듯 소중하기만 했던 시간이었다.
서울에서 형과 헤어진 뒤 얼마 후 나는 군에 입대했고 그 뒤로 다시 볼 기회는 마련되지 않았다. 군대라는 사막을 건너오면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있지 않는 인생의 길 때문이었는지 몰랐지만 그 형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살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수 십 년 뒤 형이 낙향해서 고향의 생가에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형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 친구에게조차 말하지 않고 불쑥, 불쑥 그 형을 찾아갈 일을 나는 꿈꾸고 있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이 나 혼자 그 형을 만나고 싶었다. 막연했지만 극적인 상봉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은 그 동안 잘 접어 간직해 둔 형의 미소를 다시 볼 수 있겠다는 기쁨이기도 했다.
“한 달 전, 수목장으로 모셨어.”
눈물 글썽이며 친구가 한 말이었다. 친구를 만났을 때로부터 한 달 전이었다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을까, 아니면 무심히 지고 있었을까. 그 해처럼 유난했던 꽃들의 난무(亂舞)는 일찍이 볼 수 없었다. 그 어지러움은 형을 보내기 위한 반란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내가 간직해둔 형과의 짧은 추억을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내 그리움은 그때 허무하게도 무너져버렸던 것이다.
선비처럼 은둔했다는 형의 거취에 속으로 박수를 보내고 있었으면서 왜 나는 그렇게 상봉을 아꼈을까. 멀리 4층 건물 옥상위에 서 있던 형의 모습과 함께 나를 볼 때마다 지었던 미소는 이제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은 것이 되었다. 영화 ⌜모정⌟처럼 허무한 형과의 엔딩은 상상도 하지 않았다는 때늦은 후회. 인연은 딱 그것뿐이었을까 생각하면 50년의 세월이 무정하고 가슴만 먹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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