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고/ 이태의 소설 남부군 읽으며 회문산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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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고/ 이태의 소설 남부군 읽으며 회문산 느껴보자
  • 황호숙 자문위원
  • 승인 2018.02.13 15: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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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라고 서로 웬수가 돼갖고 싸웠는가 몰라”

 

한번쯤은
                           -김영

 

육십 평생에 한번쯤은
나의 고목에도 꽃이 필 수 있을까

꼭 한번쯤은
종다리 되어 하늘을 날고
파란 보리밭에서
뒹굴어보고 싶다

한번쯤은
꿈에라도
한라산 기슭에서 백두산 꼭대기까지
달려가고 싶다

기어코 한번은
내 가슴 속 고드름을 녹여
분단의 벽을 헐어버리고 싶다

아, 생에 한번쯤은
붉은 수의를 훨훨 벗어버리고
철조망이 없는 나라
동족의 가슴에 총을 겨누지 않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

(김영 : 순창농고 출신, 빨치산 시인, 리어카 시인)

 

“1951년 3월 4일 자정 회문산을 탈출하는 전북도당 유격 사령부의 길고 긴 대열이 내리 퍼붓는 찬비와 어둠을 타고 미륵정이 계곡을 빠져 나가고 있다. 우리들, 마음의 성체이던 회문산. 꽃다운 젊은이들의 피와 살이 수없이 뿌려지고 묻힌 너 회문산아! 먼 훗날 조국 분단의 비극이 끝나고 오늘의 싸움을 나제의 옛 이야기처럼 역사 속에 묻어 버리는 날이 온다면 저 상봉 높이 금석의 기념비를 세우리라, 이곳은 약소민족의 설움이 엉켜 있는 곳. 수많은 젊음들이 조국 분단의 아픔을 몸부림치며 호곡하던 비극적 민족사의 현장이었다고.”
여러분은 ‘회문산’ 하면 어떤 단어가 떠오르시나요? 고추장, 만일사, 이성계, 양춘영, 의병운동, 풍수, 그리고 빨치산이 떠오르지 않나요? 어쩌면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 꺼내기가 쉽지 않은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오정자마을로 머슴 살러 들어왔을 때 애기 빨치산 이셨던 한 어르신께서는 아버님의 고스톱 친구셨지요. 10여년을 우리 집으로 출퇴근 하셨는데 그때 이야기를 입 밖으로 안 꺼내시더라고요.
담양 용면 가막골이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사령부가 있던 곳이고, 엽운산 고개들을 이어서 달리면 전북도당 사령부가 있는 회문산에 이르렀지요. 빨치산은 농민과 노동자들로 조직된 비정규군을 일컫는 말로 파르티쟌에서 생겼는데 1948년 여순반란사건 이후 한국전쟁까지 있었던 유격대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지요. 자료에 의하면 1951년 2월 회문산에는 약 1350명의 빨치산이 존재했고 이들에 관한 소설이 바로 이태 작 <남부군>입니다.
‘남한 빨치산’을 대표하는 이름이었던 남부군은 남한 최초의 조직적 좌익 게릴라 부대였고, 유일한 순수 유격부대였지요.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 총수 이현상의 직속부대였으며 모두 쓰러질 때까지 가장 완강했던 무력집단이었고 그래서 가장 처참하게 쓰러져갔다고 전해집니다.
중요한 것은 소설 <남부군> 상권은 순창의 많은 지명들로 덮여있지요. 구림면 회문산의 정기가 뻗치는 곳인 미륵정이, 엽운산, 아미산, 성미산, 안시내, 구림천, 장군봉 회문 연봉, 투구바위, 동계, 순창읍에 이어 임실군 일중리, 덕치지서, 오수 등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이 고스란히 적혀 있답니다.
영화 <남부군>을 기억하시나요? 1990년 안성기와 최진실이 주연이고 회문산이 배경인 영화이죠. 더욱 중요한 것은 소설 <남부군>에는 순창농림고등학교 출신 천재 시인으로 불린 ‘김영 시인’이 나옵니다. 1950년 9월말, 작가 이태는 ‘조선 중앙통신사’의 종군기자 신분으로 전주에 파견 근무를 하게 되지요. 그러나 낙동강까지 내려왔던 인민군이 거듭되는 전투에서 패하자 이태는 ‘조선노동당 유격대’에 합류하게 됩니다. 구림면 운항리 엽운산에 처음 터를 마련하지만 회문산으로 이동하면서 계속 재편하지요. 전사들의 기록과 ‘지리산 승리의 길’이라는 신문 편집도 맡았으나 모두 지리산으로 모여들게 됩니다. 빨치산의 전설 이현상을 만나게 되나, 대대적인 토벌작전으로 생존의 기로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는데 상황을 사실적으로 기자답게 써 내려갑니다. 목숨을 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대열에서 낙오된 이태는 눈 속을 헤매다가 결국 생포돼 그의 기나긴 빨치산 투쟁도 막을 내립니다.
‘맞아 죽고, 굶어 죽고, 얼어 죽는다. 빨치산은 세 번 죽는다’는 처절한 삶의 현장에서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어간 우리 삶을 기록해 달라”는 한 대원의 말이 소설 <남부군>을 탄생시킨 도화선이었다고 합니다.
김영 시인이 이 책에 나옵니다. “연세대학 국문과를 수석으로 다녔다는 그의 재질을 아깝게 생각한 이명재 시인이 그를 정치부로 소환하려 했으나 ‘나는 일개 전사로 일하고 싶습니다’ 면서 거절한 일도 있는 만큼 가냘팠으나 속은 야무진 데가 있는 청년이었다. 그 김영이 그날 저녁 편대가 막 출발하려 들자 절망과 오한으로 몸을 덜덜 떨며 내게로 오더니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는 것이었다. 만나고 헤어진 지 닷새째 되던 날 백무골에 버려진 네 명의 환자 중 김영만 살아남고 모두 죽게 되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1929년 순창에서 태어나 순창의 수재였고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1950년 회문산에 입산하여 빨치산 활동을 하였던 김영은 현실과 이상에 갈등하는 문학청년으로 등장하는데 국방경비대의 가혹한 토벌을 보면서 전북유격대를 찾아가 입산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그는 1952년 전염병으로 낙오돼 생포되었고 20년형을 언도받고 1964년 가출옥한 후 빨치산 전력으로 인해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결국 과일행상으로 생계를 꾸렸습니다. 그 와중에도 문학에 대한 꿈을 놓지 않고 <깃발 없이 가자>, <리어카의 시인>, <총과 백합꽃> 등 시집과 수필을 통해 문단에 이름을 알렸지요. 김영 시인의 안타까운 죽음 이후 순창 문인들이 그를 기념하는 백일장대회를 열고 시비 건립 등을 추진했으나 예민한 지역정서로 인해 1회 행사에 그치고 말았지요. 한국전쟁 당시 좌우로 갈려 서로에게 총칼을 겨누었던 대립의 역사는 아직 순창에서는 현재진행형인거지요. 이제는 분단의 상징이 아닌 통일의 상징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 시절 너무나 많은 청춘들이 그 산중을 방황하면서 죽어갔다. 이제 이름조차 기억하는 이 없는 그 주검들은  풍우 속에 흙이 되었으나 그들이 불태워 살랐던 핏빛 정열에는 한가락 장송곡도 없었다. 그리고 세월은 강물처럼 흘렀다. 흐르고 있다. 사랑도, 미움도, 환희도, 분노도, 마침내 모든 것이 투명으로 돌아간 역사의 강물 위를 인간은 또 흘러간다. 스스로의 의지로는 어찌도 할 수 없는 25시의 인간들이 한없이 표류 해 간다.”

봄이 오면 회문산 히여터에서, 투구바위에서, 아님 미륵정이에서 죽어간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 막걸리라도 한바탕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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