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서서(24)/ 육자배기
상태바
길위에서서(24)/ 육자배기
  • 선산곡
  • 승인 2018.03.08 16: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들녘 어디서 산곡이 아자씨가 흥얼거리는 / 육자배기 가락 내 귓가에 들릴락 말락 하는 걸 보니 / 아직도 이 애비가 봄을 타는게비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시인친구의 시 구절에 ‘산곡이 아자씨’란 이름이 들어있다. 봄 타는 제 심정을 들릴락 말락 내가 흥얼대는 육자배기 가락에서 찾았다니 절묘한 구절이다 싶었다. 이 계절이면 육자배기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는 졸작의 내 수필을 기억해낸 탓도 있겠지만 그 앞에서 정말 육자배기 흥얼댄 적이 있기도 했다. 아지랑이가 아른거리는 봄날 어쩌다 들녘에 나가면 느리고 애잔한 가락이 들려오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 착각에 덧칠하듯 나도 흥얼대보는 육자배기다. 그러나 실은 착각 아닌 현실의 기억이 있다.
경칩이 지난 이른 봄 토요일 오후였다. 적성 화탄에서 관평리 사이 맑게 흐르는 물가에 혼자서 배낭을 풀었다. 멀리 유등면 쪽으로 드넓은 논밭이 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자리를 깐 뒤 석유버너에 불을 붙였다. 알루미늄 코펠에 물 한 자락 떠다 먼저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커피 한 잔 만들어 자리에 앉았다. 진한 향이 퍼지는 커피를 천천히 마시며 먼 산을 바라보았다.
멀고 먼 산자락 아래 연분홍 띠가 보였다. 마을 앞 어귀에 이르게 핀 꽃무리였다. 어느 꽃이 먼저 피고 지는지 나는 모르고 있었다. 다만 ‘복사꽃이냐, 매화꽃이냐, 살구꽃이냐.’ 탄식만이 앞서 있었다.
아직 차가운 물에 발도 씻고 머리도 감았다. 작은 안주 하나 만들어 놓고 양재기에 소주 한 잔 따랐다. 적성강변에서만 이른 봄에 치르는 이 작은 의식, 벌써 몇 년 째였다. 술기운 때문이었나, 아니면 봄기운 때문이었나. 십리사방 아무도 없는 강가에 앉아서 나는 목청을 돋아 소리를 시작했다. ‘육자배기’였다.

내 정은 청산이요 님의 정은 녹수로구나 / 녹수야 흐르건만 청산이야 변할 리가 있겄느냐 / 아마도 녹수가 청산을 못 잊어 휘휘 감돌아 도는 구나 헤

모래톱에 반듯이 앉아서 소리를 하는 도중이었다. 문득 강 건너 앞 뚝 위에 어떤 여인이 혼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너무 먼 거리여서 그의 용모는 분명히 보이지 않았다. 젊은 아낙이었을까, 아니면 늙은 할매였을까. 미풍 따라 소리는 거기까지 흘러가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나물을 캐다, 어쩌면 들일을 하다 호맹이 내 던졌는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그는 나를 향해 앉아서 꽤 긴 시간 소리를 듣고 있었다. 소리를 마친 뒤에도 한참을, 내가 다른 일을 하다 문득 바라볼 때까지 그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해가 황사를 껴안고 서쪽하늘에 기울어 가고 있었다. 돌아가기 위해 짐을 챙기는 동안에도, 걷다 돌아서 바라보아도 여전히 여인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만 언제까지나 그 시선이 나를 향해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오래 전 일이었다.
이 계절이 슬프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저 안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육자배기가락도 처연해진다. 시인의 노래가 아니어도, 그 여인의 응시가 아니어도, 이 세상의 인연들이 세월 따라 흘러갔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문득 그 쪽 들녘에 나가 육자배기 불러보고 싶은 생각이 솟구친다. 옛날처럼 내 소리 퍼질러 앉아 들어주는 여인이 혹여 있을랑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금과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식 4월 21일 개최
  • [순창 농부]농사짓고 요리하는 이경아 농부
  • 우영자-피터 오-풍산초 학생들 이색 미술 수업
  • “이러다 실내수영장 예약 운영 될라”
  • [열린순창 보도 후]'6시 내고향', '아침마당' 출연
  • 재경순창군향우회 총무단 정기총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