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서서(33)/ 73년 유월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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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에서서(33)/ 73년 유월 · 2
  • 선산곡
  • 승인 2018.07.12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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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오

 

날은 갈수록 텁텁해지고 있었다. 장마가 오기 전 계절 특유의 무거운 대기를 휘저을 수 있는 바람조차 몇 날을 불어 주지 않았다. 부대 담장의 키 큰 포플러는 무심히 푸르러 있고, 동쪽 멀리 치악산 봉우리는 희미하게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전과 달리 만만치 않아진 우리들에게 선임들의 기세는 천천히 꺾이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닌, 대립의 공감대가 후임이었던 우리들에게 형성되면서 일기 시작한 팽팽한 긴장감이었다. 그 안에서 국지전처럼 스치듯 서로를 외면하면서도 으르렁거리는 감정은 그와 나 둘 만의 것이었다.
취침인원 30여명 밖에 안 되는, 장교 장기하사관 숫자가 기간사병보다 더 많은 의무부대였다. 과장된 것인지는 모르나 1군사령부 관할에서 근무여건이 가장 좋다는 소문까지 나있었지만 내 숨은 증오를 삭혀내기엔 지옥이나 다름없는 공간이었다. 전에 없이 새롭게 치솟아 오른 감정이었다.
탈피하듯 토요일 오후 외출증을 끊었다. 군사도시 군인극장에 크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림간판이 걸려 있었다. 그가 주연이었고 또한 감독 데뷔작이라는 <어둠속의 벨이 울릴 때>라는 영화였다. 집착에 의한 증오가 비극으로 치닫는 결말이었지만 <미스티를 들려주세요>라는 원제처럼 영화 속 음악은 감미로웠다.
극장을 나오면서 내가 이 영화를 본 것은 우연함이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증오의 대상이 누구라는 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왜 증오하는가? 내가 스스로에게 묻는 말이었다. 답을 얻을 수는 없었지만 증오는 나 혼자만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문득 허망해졌다. 허망한 결론, 그 마음으로 원주 시내를 싸돌아다니고 있었다. 귀대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선 병장님.”
누군가 부르는 소리였다. 원주시 인근 횡성에서 입대한 선임 이 병장의 친구였다. 주말이면 결혼까지 한 이 병장의 집에 떼로 몰려간 기회가 많았던 탓에 자연 그의 이웃들과도 안면이 생긴 터였다. 그렇지만 작지 않은 군사도시에서 이렇게 공교롭게 만날 수 있기는 정말 드믄 일이었다.
“혼자십니까?”
의아해 하면서 자기친구 이 병장을 만난 듯 나를 반겨한 그가 끌고 간 곳, 시장 이층의 주막집이었다. 그는 제대한지 얼마 되지 않은 예비군 신분이었고 친구인 이 병장 또한 전역 특명을 받아놓은 사람이었다. 방 벽에 붙은 달력이 6월 23일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 내년 유월이면 나는 이 하늘아래 서 있지 않겠지. 이 고통스런 인간관계 속에서 시달리지 않겠지.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는 나에게 술잔을 들다말고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고민 있으십니까?”
대답은 하지 않고 쓰게 웃었지만 깜냥에 태연을 가장한 감정을 들킨 것 같아 나는 무안했다. 속내를 건넬 만큼 각별한 사이도 아니었고, 몇 주 전 처음 만난 사람에게 받게 된 호의가 부담스러웠지만 그와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것이 우선 위안이 된 것만은 사실이었다. 일기장에 무언가 써놓고, 그 문장 다시 보기 너무 두려워 먹물로 지웠던 며칠 전의 행위가 생각났다. 술에 취해 적은 문장은 곧장 지워버렸지만 다음 날 읽을 수도, 뭐라고 썼는지 조차 기억할 수 없었다. 먹물은 진했고 덧칠은 꼼꼼했다. 다만 치열한 고통 끝에 몇 마디 썼던 문장이 스스로 섬뜩했던 것만은 분명했다.
해거름이 시작되었다. 이 병장 친구와 헤어져 태장동 가는 시내버스에 올랐다. 혼란스런 기분은 술기운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와 술을 마시면서 나는 내 고통을 토해 내기 시작했었다. 헤어지기 전 그가 한 말이 뇌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 증오, 실은 연민(憐愍)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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