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서서(35)/ 누구 앞에서 육자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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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에서서(35)/ 누구 앞에서 육자배기
  • 선산곡
  • 승인 2018.08.16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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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대사습이 한참일 때였다. 전주 중앙동 네거리 근방 어느 지하식당 방에 모처럼 봉강, 청계, 여강, 유철이 함께 한 자리였다. 술이 서너 순배 돌아 모두가 거나해졌을 때였다. 화장실을 다녀 온 유철이 ‘저, 형님들.’ 하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오다 들으니 저 쪽 방에 국악인들 노는 소리가 들립디다.”
함께 자리를 할 수 있겠느냐고 주인남자를 보냈다고 했다.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내가 쓸 데 없는 짓을 했다고 말했다.
“그게 아니라, 형님. 들어보슈.” 주인남자가 돌아와 그 쪽에서 시큰둥하더라는 말을 듣고 유철이 직접 찾아갔다는 것이다. “어디서 온 사람들이간디?” 봉강이 턱을 치켜들고 물었다.
“충청도 어디, 대사습놀이 민요 심사위원들이라는디.” “방해하면 안 되지.” 합석을 경계한 내 말에 유철이 눈을 부릅떴다.
“그게 아니라 우리 가락 하시는 분들이 이 고장에 오셨으니 술 한 잔 대접하겠다고 애써 말하는데 코방귀를 뀌드란 말이요.” “코방귀를 뀌어?” 누군가 발끈했다. 아무튼 ‘건너오시우’라는 그 쪽 팀 남자가 대답했다는 말이 즐겁지는 않았다. 우리 쪽에서 기세를 눌러야겠다는 심사로 모두 그 자리로 건너가자는 결론이 난 것은 따지고 보면 술김이었다. 기세를 과시하겠다는 것은 오만이었지만 얼마나 대단한 실력을 가진 분들인가 하는 조심스런 경외심도 있어 그냥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일행이 건너가 방에 들어서니 사십대 중년의 여자가 서서 <뱃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접대의 예로 술과 안주까지 들여간 것은 무례를 희석시키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우리가 그 방에 들어가 자리에 앉아도 누구 하나 반기는 사람이 없었다. 여자는 계속 같은 사설, ‘달은 밝고 명랑헌디 고향생각 절로난다’ 라는 가락만을 이어 부르고 있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대사습에 참여한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봉강의 질문에 50대 중년남자가 심드렁 대답을 했다. “옥천서 왔시유.” “대사습 심사위원들이십니까?” “아니유.”
공연한 합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들만의 흥취를 방해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사습 때문에 찾아온 손님들에 대한 토박이들의 친절이 무시당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일면 살펴보니 국악의 깊은 맛이 내공으로 쌓인 풍취가 엿보이지 않아 실망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권하지도 않았는데 남자가 소리를 하겠다고 목을 가다듬었다. 우리 일행들이 권하는 술잔에 그나마 분위기가 조금은 부드러워진 뒤였다.
“육자배긴디, 그게 뭔고 허니.”
뜻밖에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가 육자배기 한 가락 하겠다며 ‘뭔고 하니’ 하는 부연 설명을 하는 동안 가장 긴장한 사람은 나였다. 남자가 소리를 시작했다. 사람이 살며는 몇 백 년이나 살드란 말이냐. 조그만 목소리로 박은 무심히 흘리고 있었다. 꺾임도 없고 호흡도 짧아 밋밋한 소리였지만 흘리는 박자를 잡기 위해 내가 상 바닥을 가만히 두드리기 시작했다. 진양조 박을 집으며 이 충청도 사람이 왜 하필 육자배기를 부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 잔 술 마시다보니 문득 우리들만 남아있었다. 어느 사이 그 사람들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들이 소리바탕 노는 자리 부러워서 한 자리 끼겠다고 청했던 우리들로 알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게 아니구나, 그들이 당황한 것을 눈빛 예리한 유철에게 이미 들통이 난 뒤였다. 남자가 부른 육자배기 후렴구 뒤에 다음 사설을 유연히 우리 쪽에서 이어받은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누구 앞에서 육자배기여?” 아쉬워하지도 않고 남은 술 마시는 중에 유철이 하는 말이었다. 육자배기는 가끔 어렵게, 그렇다고 함부로 청하지도 않았던 남도의 장중한 가락임을 우리 모두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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