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서서(43)/ 마흔 살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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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에서서(43)/ 마흔 살의 편지
  • 선산곡
  • 승인 2018.12.12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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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리지 않은 초겨울의 풍경이 차창 밖으로 흐릅니다. 저녁연기 한가로운 산자락을 한숨으로 바라보며 흔들리는 내 모습, 해 마다 이맘때면 해보는 상상입니다. 때로는 현실이기도 했었고 그 현실에서는 지친 모습이었지만, 아무튼 어딘가 떠났다 돌아와야만 한다는 집착에 요즘 또다시 시달리고 있습니다.
귀로는 지치는 것, 완전한 어둠이 내리면 눈을 감고 내 안에 누적되어 있는 모든 것들이 소진되었는가를 스스로 묻기도 했습니다. 마치 격랑 뒤에 오는 허무한 정적이 새로운 힘을 준 것처럼 생각하고 싶었지만 실은 착각이었겠지요. 번번이 저는 그렇게 중얼거렸을 겁니다.
사랑, 증오가 내게 남아 있는가. 남아 있더라도 부질없는 것들, 돌아가 내 자리에 서면 얼마동안 백치처럼 멍한 상태에 빠져있겠지. 그 흐름은 그 부질없는 사념을 지웠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떨쳐가는 것이 있지만 다시 쌓이는 것이 어떤 것임을.
내 안에 무엇이 얼마나 남아 있기에 그것을 팽개치기 위한 탈출을 염원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좋은 일들은 물처럼 새어 잊혀져버리고 궂은 일만 앙금처럼 남아서 회한이 되는 것이겠지요. 어쩌면 생각뿐인 길 떠남을, 살다가 갖는 작은 소망이 이 계절에 그냥 간절할 뿐입니다. 귀로의 자리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알면서 말입니다. 한해의 끝자리에서 갖는 작은 미련의 불씨가 분명하지만 그 불씨는 언젠가 사위어가겠지요.
날이 추워졌습니다. 한 때 녹음 충만했던 나무들도 잎 지워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채 서 있습니다. 멀리는 산과 구름, 가깝게는 회색 건물들이 정적으로 파묻혀 있습니다. 저 정적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깃발처럼 흔들립니다. 눈이나 올 것이지. 눈이나 펑펑 내릴 것이지.
작년, 새벽으로 유난히 짙은 안개가 끼던 무렵, 가까운 사람의 부음을 들었습니다. 그가 산모퉁이로 가 버린 다음날 첫눈은 내렸습니다. 그것도 한 사나흘 그치지 않고 내려쌓였지만 한숨으로 텅텅 빈 이 가슴을 채울 수는 없었습니다. 어디 메쯤 서서 방황하고 있을지 모르는 그에게도 눈은 내렸을 것입니다. 참으로 첫눈은 길게도 내렸습니다. 올 첫눈도 그렇게 길고 깊게 내렸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이 시절아 어서 가라. 아파 잦아지던 한탄을 뒤로 한 채 또 한 해를 넘기는 것 같습니다. 세월은 마디가 없는데도 한 해의 끝은 있어왔고, 고통은 그 끝에 지워질 것이라는 기대로 살아왔습니다. 아마 그것을 우리는 희망이라고 말했으며 또한 앞을 바라볼 수 있었을 겁니다.
한 며칠 발이 시렸고 때맞춰 오늘 목도리를 둘렀습니다. 바람이 불어 그 목도리가 나풀거립니다. 목도리의 흔들림이 슬픈 유희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눈은 오지 않지만 그런 흔들림이나마 즐길 수 있어 다행입니다. 지금의 내 모습, 마흔 살의 자화상이 조금 춥습니다.
차가운 날 몸 건강하십시오.

 

1989년 12월, 마흔 살의 걸음에 쓴 편지를 우연히 다시 읽었다. 누구에게 썼는지도 잊었다. 보내지 않은 편지가 분명했지만 세월의 흔적은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다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고통, 그 고통의 길이 달랐을 뿐 내 인생의 걸음은 제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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