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어머니 같은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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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어머니 같은 고향
  • 강성일 전 순창읍장
  • 승인 2019.02.14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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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일(금과 전원) 전 순창읍장

금과면 아미마을로 이사를 온지 두 달이 지났다. 광주로 간지 18년 만이다.
광주로 간 건 애들 교육 때문이었다. 그땐 인재숙이 없어 자식 교육을 위해 전주, 광주 등 도시로 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도 그랬다. 집사람과 애들은 광주에 있었고 나는 직장이 있는 순창, 잠자는 광주를 시계추같이 왔다 갔다 했다.
공무원들의 도시 거주 출퇴근에 대해 군민, 의회, 지휘부에서도 수시로 지적을 했다. 요즘 출산율 저하와 같은 형국이다. 여론과 대안은 많은데 결과는 탐탁지 않은 것이다.
광주 출퇴근이 계장 때 까진 그런대로 지나갈 수 있었다. 2002년 과장으로 승진되니 부담이 되었다. 명색이 간부 공무원인데 여론을 도외시 할 순 없었다. 나름대로 방법을 찾은 게 3일은 순창에서 자고 3일은 광주로 가는 것이었다. 순창에서 잘 땐 어머니 집으로 갔다. 혼자 계시니 내가 가는 게 효도인줄 알았다.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께서 힘들어 하시는 걸 알게 됐다. 내가 순창에서 자는 날은 내 밥을 챙겨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없으면 노인당이나 식당 하는 딸집에서 식사를 해결하는데 나 때문에 밥을 해야 했다.
내 밥을 미처 준비하지 못하실 땐 식당에서 쟁반에 담아 가져 오시기도 했다. 그렇게 몇 년 지내다가 2006년 순창읍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읍장이 되고 보니 과장 때처럼 순창 반, 광주 반 생활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읍사무소 일 대부분이 생활행정이기 때문에 지역에 살아야 할일도 보이고 읍민들과는 이웃이라는 정서적 공감이 필요했다. 순창에서 살기로 하고 광주에 있는 집사람과 상의를 했다.
집사람이 조건부 동의를 했다. 순창에 와서 살면서 자기도 일을 할 수 있게 천연비누 가게를 마련해 달라는 것이다. 그 당시 순창에는 천연비누 가게가 없어 기존 업체와 마찰이 없는 게 좋았다. 흔쾌히 승낙했다.
가게는 작았다. 그곳에서 7년여를 살다 2014년에 퇴직하고 다시 광주로 갔다. 도시생활이 편하기는 하다. 사람들이 나를 모르니 복장, 용모 등도 신경 쓰지 않고 남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고향에 살면 한 뼘 얼굴과 체면 때문에 행동과 처신도 조심해야 한다. 그래도 광주는 객지였고 정이 가지 않았다. 자식들도 성장해서 광주에서 살 이유가 없었다. 순창으로 간다고 하니 여러 이유를 들면서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이 든다는 건 고향의 자연에 가까워지는 거라 생각한다.
이사를 와보니 좋은 점도 어려운 점도 있다. 순창도 문화나 복지시설이 갖추어져 그런 쪽에 불편은 없지만 아파트에서 살다가 단독 주택으로 바뀌니 신경 쓸 게 많다. 아파트에선 문제가 생기면 대부분 관리사무실에서 해결해 주는데 단독주택이다 보니 우리가 해야 한다. 집안일이 익숙한 사람에겐 별거 아니겠지만 경험 없는 나에겐 큰일이다. 처음으로 하니 일눈은 어둡고 손은 서툴고 머릿속은 캄캄하다. 1월 추울 때 보일러가 고장 나 며칠을 고생했다. 보름 전 부턴 인터폰이 오작동 되어 불규칙적으로 벨이 울린다. 야밤엔 깜짝 놀란다. 아마 전류 때문에 오작동 하는 것 같은데 방법을 찾지 못해서 떼어놓았다.
집사람 지인이 와서 방에 있는 냉장고를 보고 밑에 받침을 넣어서 균형을 잡아 주기도 했다. 일련의 일을 경험하면서 혼자 사는 노인들의 애로는 오죽할까 싶다. 큰 업체의 제품은 연락하면 와서 손을 봐주지만 사소한 것들은 전화 할 곳도 모르겠고 오라 할 수도 없어 내가 해보는데 산 넘어 산이고 물 건너 물이다. 하는데 까지 해보고 안 되면 좀 불편하게 살려 한다.
세상사가 그렇다 현실을 바꾸는 건 어렵지만 받아들이는 건 마음만 먹으면 된다. 당하는 불편이 아니라 선택하는 불편은 굶주림과 단식 정도의 차이일 거다. 사막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죽는 사람들의 가장 큰 원인은 폭염과 갈증보다는 길을 잃었다는 불안감과 빨리 찾으려는 조바심 때문이라 한다. 이젠 삶의 환경이 바뀌었으니 예전의 조급함을 버리고 농촌 생활에 적응하고 자연의 흐름에 따르려 한다.
자연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고 서두르지 않는다. 부족한 자식을 감싸주는 어머니 같은 고향에서 비틀거리기도 하고 넘어 지기도 하겠지만 괜찮은 순창군민, 금과면민으로 살려한다. 자연에게 배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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