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인물(2) 노사 기정진, 조선 성리학 마지막 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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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인물(2) 노사 기정진, 조선 성리학 마지막 거장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19.02.14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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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 기정진

이번에 소개할 순창 출신의 인물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이다. 기정진은 서경덕ㆍ이황ㆍ이이(조선 전기), 이진상ㆍ임성주(조선 후기)와 함께 조선시대 6대 성리학자로 꼽히는, ‘조선 성리학의 마지막 거장’으로 평가 받는 인물이다. 또한 19세기 중반 월등한 군사력을 앞세우며 출현한 서구열강 앞에 조선의 운명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했을 때 위정척사(衛正斥邪)의 논리를 최초로 설파한 인물이기도 하다.

 

생애

기정진의 본관은 경기도 행주(幸州)로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판중추부사 건(虔)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재우, 어머니는 안동권씨로 덕언(德彦)의 딸이다. 기정진은 1798년(정조 22년) 6월 3일 순창군 복흥면 동산리(일명 조동, 구수동)에서 태어났다.
큰 선생 아래에서 글을 배운 적도 없으나 네 살 때 <효경>과 <격몽요결> 등을 읽었고, 이때부터 5~6년 동안 <소학>ㆍ<대학연의>를 비롯한 경서와 <강목>ㆍ<춘추> 등의 역사서를 두루 공부했다. 그는 기억력이 매우 좋아서 보는 것은 모두 외웠다고 한다.
18세(1815, 순조 15) 때는 양친을 거의 동시에 여의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선대의 고향인 장성군 황룡면 하남으로 이사하게 되어 장성에서 여러 차례 집을 옮기며 살았다.
80세 되던 1877년에 장성 진원 고산리에 이사하여 그곳에 담대헌(澹對軒)이라는 정사를 짓고 많은 문인들과 함께 교유하다 1879년(고종 19), 82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학문 연마와 사상

기정진은 1831년(순조 31)에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했지만 아버지의 유언으로 대과는 응시하지 않았고, 높은 명성 때문에 여러 벼슬에 제수되었지만 아주 잠깐을 빼고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평생을 학문에만 매진했다. 그의 관직 생활은 아주 짧아서 45세(1842, 헌종 8) 때 전설사별제에 임명되어 엿새 동안 근무한 것이 전부였다. 그 뒤에도 사헌부 장령ㆍ집의ㆍ사헌부 집의ㆍ동부승지ㆍ호조참의ㆍ호조참판 등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지만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특정한 사제관계나 학맥에 의존하지 않고 성리학의 근원인 중국 송대의 학문을 직접 연구해 독자적이고 높은 수준의 견해를 제시했다고 평가된다. 기정진의 학문은 이(理)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이일원론(理一元論) 관점의 주리론(主理論)이라고 요약된다. 그리하여 이황ㆍ이이 이후 근 300년간 계속된 주리(主理)ㆍ주기(主氣)의 논쟁을 극복하고 ‘이(理)는 하나지만 수많은 형태로 나뉜다’는 이일분수(理一分殊)의 이론에 의한 독창적인 이(理)의 철학체계를 수립하였다.
그런 성리학의 대표적 저술은 <납량사의>와 <외필>이다. ‘더위를 피해 서늘한 기운을 느끼며 사사롭게 의논하다’는 의미의 <납량사의(納凉私議)>는 그런 그의 주리론이 가장 잘 집약된 논문으로 평가되는데, 매천 황현은 이 글이 당시 여러 학자들의 이론을 모두 쓸어버릴 정도라고 격찬했다. 46세 때에 저술하고 죽음을 몇 달 앞둔 81세의 말년에 수정ㆍ보강한 <외필(猥筆)>은 주기론(主氣論)을 철저히 배격하느라 율곡 이이의 학설에도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 이론으로, 뒤에 큰 파란을 일으킨 논문이었다.

시대적 문제 고민 - 병인양요에 올린 상소

조선시대 말기는 세도정치의 폐해와 양반 관료체제의 문란, 극에 달한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가혹한 수탈로 민중들의 삶이 매우 피폐해져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발생하여 지배체제의 위기가 가중된 위기의 시대였다. 그런데 거기에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영국에 패배하였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또한 1866년에는 프랑스 함대가, 1871년에는 미국 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러한 시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다양한 형태의 운동이 모색되고 등장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일부 지식인들은 개화사상을 선택하였고 많은 민중들이 동학사상을 내세웠지만 조선사회의 주도세력이었던 대부분의 양반들은 위정척사의 논리를 주장했다.
기정진이 69세이던 병인년(1866년, 고종 3년)은 병인양요(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인 병인박해를 구실로 삼아 외교적 보호를 명분으로 하여 프랑스가 일으킨 전쟁)라는 전대미문의 난리가 일어났던 해다. 서양 군대가 강화도를 침범하면서 세상이 요동칠 때, 그런 소식을 들은 노사는 나라를 근심하고 걱정하느라 식음을 전폐하고 견딜 수 없는 애국심에서 곧장 임금에게 상소를 올린다.
이름 하여 <병인소(丙寅疏)>라는 상소였다. 그해 7월의 일인데, 이른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논리를 설파한 국내 최초의 상소였다. 같은 때에 화서 이항로도 비슷한 내용의 상소를 올리는데 그때는 9월이었으니 기정진이 이항로보다 2개월 전에 위정척사의 논리를 폈던 것이다. 위정척사(衛正斥邪)란 정학(正學)인 성리학을 지키고 사학(邪學)인 서학(西學), 즉 천주교를 배척하는 유교적 반이단운동을 말한다.
<병인소(丙寅疏)>라고 불리는 <육조소(六條疏)>의 상소에서 그는 외세에 대비하는 여섯 가지 방비책을 제시했다. ① 미리 조정의 계획을 확정할 것, ② 먼저 외교적 언사를 다듬을 것, ③ 지형을 살필 것, ④ 군사를 조련할 것, ⑤ 의견을 널리 구할 것, ⑥ 시급히 내부를 정비해 외침을 물리치는 근본으로 삼을 것 등이었다. 이 상소의 내용은 그 뒤 전개된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고 후에 의병전쟁의 정신으로 구체화되었다.

의의와 평가

노사는 조선사회의 해체와 서구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위기 속에서 이(理)의 절대화를 추구함으로써 나름대로 해결책을 제시하려 했다. 그가 주창한 위정척사사상은 주자학적 화이사상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봉건적 전통질서를 옹호하고 보수성과 배타성, 사대주의적 모화사상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적 한계성은 한말의 역사적 위기상황 속에서 애국우국의식으로 나타나 민족주의사상으로 승화되었다. 그리고 기우만(기정진의 손자이자 호남유림의 종장), 기삼연, 고광순, 정재규 등 한말 의병의 정신적인 토대가 되었다. 18세부터 전남 장성에서 살면서 그에게 친히 글을 배운 제자가 600여명에 이르고 그들 제자의 제자들까지 합하면 6000여명에 이르는 호남의 노사학파를 형성하였다.
노사 기정진은 나라가 위기에 처한 어려운 시기에 민족자존을 위해 몸부림치다 살다간 순창이 낳은 꼿꼿한 선비였다.  

 

고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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