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순창의 3ㆍ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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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순창의 3ㆍ1운동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19.02.2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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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인 1919년, 순창의 3ㆍ1운동도 전국 여러 지역과 마찬가지로 3월에서 4월에 집중되었다. 순창의 만세 운동은 박동진 등의 청년ㆍ학생들과 천도교계의 역할이 컸다.
애국청년 박동진(朴東鎭, 1899.3.9∼1954.6.23)은 3월 초 서울ㆍ평양ㆍ전주 등지의 만세시위 소식을 접하고 순창읍 장날을 이용하여 순창만세시위를 계획했다. 밤을 새워 가면서 ‘조선 독립국 만세’ ‘조선 독립국 독립 만세’ 등의 문구를 종이에 크게 써서 3월 17일(음 2월 16일) 새벽에 순창군청ㆍ순창헌병분견소ㆍ순창학교조합 앞 게시판 등에 붙여 전국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났음을 알렸다. 그러나 일제 헌병대 등의 경비가 삼엄하였기 때문에 장날 거사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순창군에서는 3월 20일, 순창읍 금산에서 독립만세의 함성이 시작됐다. 밤이 되어 일제의 경계가 풀어진 틈을 타서 천도교인들을 중심으로 군민 약 200명이 비밀연락으로 순창읍 금산에 모였다. 그리고 준비했던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야간의 정적을 깨뜨리는 감격적인 만세소리는 금산에서 읍내로, 군민들의 가슴 속으로 메아리 쳤다. 그리고 헌병대의 수색작전에 의해 구속당한 노병화(盧炳華) 등 10여 명의 천도교인들은 일제의 고문에도 굽히지 않고 항변하여 독립 국민으로서의 기백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4월 26일의 장날을 기하여 만세운동을 일으키려는 계획이 진행되었다. 이때에도 애국청년 박동진은 4월 24일 자택에서 “4월 26일 순창 장날에 순창 군민은 20세부터 50세까지 전부 집합하여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독립 만세를 외치자. 만일 만세를 부르다가 죽더라도 이후 우리 외의 독립을 계획한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 안심하고 만세를 부르자”라는 내용을 쓴 종이 한 장과 “4월 26일은 독립 만세를 부르자. 조선인을 죽이려면 죽여라. 우리들이 죽어도 마침내 독립을 도모할 자가 5000만 명이 있으니 죽일 터이면 죽여라”는 글을 쓴 종이 한 장을 작성하여 4월 25일 새벽 1시경 전자는 순창면사무소 게시판에, 후자는 게시판 부근 돌담에 붙여 사람들을 독려하였다.
그러나 이 날의 계획 역시 일제의 무력 경계에 의하여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며, 격문을 작성하여 붙였던 박동진은 일제에 검속되어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1년간의 옥살이를 하였다.
한편 순창군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박동진의 활동과 함께, 여러 청년들의 활동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순창 접주로 활동했던 동암(東菴) 우동원(禹棟源)의 차남인 우치홍은 당시 서울의 보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었다. 3월 1일에 탑골공원 3ㆍ1선언식에 참가하고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3월 7일에는 천도교 총부(總部)에서 독립선언서 200장과 <독립신문> 150장을 가지고 귀향길에 올랐다. 그리고 이리역에서 내려 도보로 전주ㆍ무주ㆍ진안ㆍ임실 등을 차례로 방문하면서 천도교구실 혹은 지사들의 집을 찾아 순창으로 들어오던 중 인계면 쌍암리 거릿집에서 미행해 온 헌병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원적이 순창읍인 정홍모 청년은 남원공립보통학교에 부훈도로 있으면서 시민과 생도들에게 틈 있는 대로 독립운동을 격려하였으며, 아동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노래를 전파하다가 끝내는 적측에 발각되어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정순환(鄭順煥)의 경우도 4월 11일 순창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를 주도하기로 결심하고 4월 10일 밤 자택에서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쓰고 그 옆에 ‘음력 3월 11일 시장에서 백성들이 일심으로 힘을 합하여 만세를 부르기 바란다. 헌병이 나와서 금지시키면 모두 일어나 베어 버리고 만세를 부르기 바랄 뿐이다’라는 내용을 기재하였다.
순창인들을 포함하여 전국 13개 도 12부 212개 군에서 펼친 치열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3.1운동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결국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3.1운동은 패배한 운동이라고 단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독립운동은 쓰라린 패배의 과정이 곧 승리의 미래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었다. 3.1운동은 ‘위대한 패배’를 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귀한 옥동자를 낳았다.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출범 100주년이 되는 해다. 100년 전의 이 두 민족사적 거사는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게 된 뿌리임을 새삼스럽게 확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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