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인물(3) 양춘영 의병장, 회문산 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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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인물(3) 양춘영 의병장, 회문산 호랑이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19.02.27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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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계면 도룡리에 있는 양춘영의 묘. 원래 구암면 국화촌에 있었으나 1990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순창군청>

이번 순창의 인물은 의병장 양춘영(1875∼1910)이다. 양춘영은 1905년의 을사의병 때는 최익현과 임병찬 부대에서 그리고 1907년 정미의병 때는 천혜의 요새라고 불리는 회문산을 무대로 신출귀몰한 유격전을 펼치며 일본군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던 의병장이었다. 전북지역 항일 의병사에서 가장 혁혁한 전과를 세운 의병대장 양춘영을 소개한다.

 

회문산 호랑이의 포효

휘는 춘영이요. 자는 윤숙(允淑). 호는 춘계(春溪)이며 본관은 남원이다. 양춘영은 양윤숙(楊允淑)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자료에 그의 이름은 대부분 그의 자인 윤숙으로 돼 있고, 때로는 연영, 인영, 또는 춘영으로 되어 있다. 의병활동 전략으로 여러 가지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으로 추정되나, 족보에는 춘영으로 기록돼 있다. 묘는 선산인 인계면 도사리에 있다. 1980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양춘영은 1875년 음력 12월 2일(고종 12년)에 순창군 구림면 국화촌에서 양석민(楊錫民)과 해주 오씨(海州吳氏)의 세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골이 장대할 뿐 아니라 성격이 호탕하고 인품도 뛰어났다고 한다. 남달리 무예를 좋아해서 학문을 닦으면서도 틈만 나면 활을 쏘고 창술을 익혔다. 장성하여 순창군청 주사로 임용되어 관리를 지냈다.
일본의 침략정책으로 나라가 점점 기울어감에 분개하여 그 직을 그만두고 구국운동에 참여키로 결심하였다. 그러던 중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양춘영은 회문산 장군봉에 올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다짐한다. 면암 최익현(崔益鉉)이 전국에 구국의거(救國義擧)를 호소하며 호남의 임병찬(林炳瓚)과 의병을 이끌고 정읍, 내장을 거쳐 순창에 이르자, 채영찬(蔡永贊)ㆍ김갑술(金甲述) 등과 함께 서른 살의 양춘영도 분연히 일어서 의병진에 함께 한다.
그러나 인근 고을을 차례로 점령하다가 구림면 화암리 뒷산에서 최익현과 임병찬 등 지도부가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일본 대마도로 압송되었다. 최익현은 대마도에서 사망하고 임병찬 등 의병장들이 억류되자 양춘영은 잠시 의병활동을 멈추었다가 1907년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이듬해인 1908년 다시 일어섰다.
양춘영은 흩어진 동지들을 모아 회문산을 근거지로 하여 호남 각지와 향교에 통장(通狀)과 격문을 발송, 1200명의 의병으로 결성하였다. 그중 120명을 선발하여 총 270정 칼 300자루를 준비하여 좌선봉 최화(崔華), 우선봉 임순호(林洵豪), 중군 최산흥(崔山興), 후군(后軍) 이국찬(李國贊), 향관(餉官) 서기협(徐基俠), 교련관(敎練官) 한자선(韓自善)으로 의병진을 구성하고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호남의군부의 도총관이 된다.
“난신들이 나라를 도모하여 오백년 사직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적의 우두머리는 무리를 거느리고 누르니 누가 삼천리강토를 다시 일으킬 것인가?(중략) 원수의 쓸개를 씹으며 생명을 버리고 의를 취하고자 하노니,(중략) 가만히 생각하니, 내가 비록 재주는 없으나 장차 앞장서서 국모의 원수를 갚을 것이리라. 병졸은 비록 정예치 못하나 마땅히 뒤에서 유격대가 되어 백성의 원한을 씻을 것이니∼”라는 격문을 내걸고 의병들을 지휘한다.

양춘영 의병장의 눈부신 활약

그는 신출귀몰한 방법을 동원, 일본군과 경찰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해 엄청난 피해를 입혔기에 현지 주민들은 그를 신격시 했다. 양춘영의 활동 중심무대는 천혜의 요새라고 불리는 회문산이었다. 중봉 아래 ‘돼지툼벙’이라 부르는 계곡이 있었던 ‘안내앙굴’이란 마을에 훈련장을 마련하고 정예부대를 양성하였다고 한다.
양춘영의 활동은 재판 기록과 《한국독립운동사》를 통해 알 수 있는데 주로 1909년의 활동 기록이 남아있다. 1908년 음 8월 향관(餉官) 서기협으로 하여금 부하 22명을 인솔하여 구림면 화암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게 하여 전과를 올렸다.
음력 9월에는 중군 최산흥이 40여 명을 인솔하고 구림면 국화촌에서 남원수비대를 기습하기도 하였다.
11월에는 최산흥에게 50∼60명의 의병을 지휘하게 하여 임실군의 일본군 막사를 불태워 버렸다.
1909년 음 정월에 후군 이국찬(李國贊)이 12명의 병력으로 서면 죽전리의 순창 수비대 10여 명을 공격하였다.
2월에는 교련관 한자선(韓自善)이 병력 30명을 인솔하고 회문산 기슭 산내리에서 순창에 있는 일본군수비대 10여 명을 공격하게 하여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4월 27일에는 순창군 오산면 우곡리(牛谷里)에서 양윤숙의 부하 최삼형(崔三亨)이 의병 20명을 데리고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며,
5월 7일에는 순창군 적성면 관평리(官坪里)에서 소속 의병 11명이 총기를 휴대하고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인화면(仁化面, 현재의 인계면) 방면으로 몸을 피하였다.
9월 9일 순창군 구암면 구산동(현재의 구림면)을 순찰하던 수비대 통역 박찬탁(朴贊鐸)을 사살했다.

망국의 슬픔 안고 36세에 순국(殉國)

이와 같이 양윤숙은 향리인 순창을 중심으로 의병항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의병들 대부분이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농민들이어서 한계는 있을 수밖에 없었다. 1909년 9월부터 일본은 군경 합동으로 대토벌작전을 실시하니 그의 부하들은 거의 체포되거나 사살돼 지리멸렬 상태가 되었다. 양춘영도 거점을 상실하고 피신하였으나 결국 12월 3일 헌병대에 의해 김제군 월산면 봉월리에서 김제수비대에 체포되고 만다.
1910년 3월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교수형을 언도받고, 4월 14일 순국하였다. 이로써 그의 4년에 걸친 의병활동의 막을 내리고 36세의 젊은 나이로 망국의 슬픔을 가슴에 안은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가 지키려했던 조국은 몇 달 후인 1910년 8월 22일 항일합병조약이 체결되고 의병들의 의거 활동이 좌절되면서 순창 지역도 일제 강점기에 들어가게 되었다. 
교수형을 집행할 때 일본의 신문사 기자가 촬영한 사진이 1970년대에 동아일보사에 보내졌는데 유족인 양병관이 보관하다 손질 후 1986년 3월 1일 <동아일보>에 실려 양윤숙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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