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태서 전 도의원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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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태서 전 도의원 별세
  • 림양호 기자
  • 승인 2019.02.28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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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년 86세…군사독재 시절 지역 야당 ‘지킴이’

작은 체구에서 풍기는 단단함도 세월을 이기지 못했다.
1960-70년대 청년, 1980-90년대 장년까지 30년 넘게 야당 당원 때론 당료였다. 7080 시절 순창읍내에서 작은 체구지만 쉽게 대할 수 없었던 지략가였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 때도 야당을 멀리하지 않았다. 지역 여론을 세우는 정치인이었고 지역 현안을 피하지 않는 해결사였다. 순창초(37회) 순창중ㆍ순창농림고(제일고)를 졸업하고 20대 초반부터 정당인으로 활동하다, 1961년 5ㆍ16 군사 쿠데타 이후 고난의 세월을 보내다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동교동을 다니며 민주화된 세상을 꿈꾸다, 전두환 신군부의 등장으로 또 탄압받았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 격리되고 모진 강압을 견뎌야 했다.
고난의 길은 너무 길었다. ‘동교동계’로 불리는 시골(?) 정치인이지만 할 수 있는 일을 피하지 않았다. 1984년 5월에 결성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지방자치특별위원회 부위원장, 신민당 중앙상무위원으로 활동했다. ‘정치풍토쇄신법’에 의한 정치활동 규제가 1987년 해금되었다. 그해 11월 김대중 선생을 지지하는 평화민주당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평화민주당(평민당) 대통령후보 순창군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한 평민당은 1990년 7월 재야세력 일부와 신민당을 창당하였다. 1991년 3월에 실시한 지방자치단체 의회 의원선거에서 4대 전북도의원(1991중반~1995년중반, 4년)에 당선됐다. 하지만 이 지방선거에서 패배(전국적 판세)한 신민당과 민주당은 1991년 9월 민주당 당명으로 합당해 민주당 소속이 되었다. 30년 넘는 재야생활을 마치고 제도권 정치를 시작했다. 1995년 선거에서는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제5대 도의원(95 중반~98년 중반, 3년) 당선돼 부의장으로 활동했다. 1998년 6월 4일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국민회의 공천을 받지 못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아깝게 졌다.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새천년민주당 공천을 받아 순창군수에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그의 일생은 고난과 역경의 점철이다. 청ㆍ장년 30년 넘는 세월 동안 광야에서 온몸에 광풍을 맞으며 야당을 지켰다. 중년 넘어 전북도의회 부의장을 역임하고 고희 앞두고 “30여년 넘게 지역 야당을 이끌어 온 ‘고향 지킴이론’을 내세우며 일자리 창출과 교육환경개선 등의 공약”을 내걸었으나 좌절했다.
1934년 12월 24일, 순창읍에서 태어나 평생, 한 번도 스스로 고향을 떠나 생활하지 않은 구태서 전 도의원이 눈을 감았다. “한때 순창읍 여론을 쥐락펴락했다”라는 그는 모진 풍상에는 의연했는데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지난 2월 25일 향년 86세 나이로 눈을 감았다.
성장한 3남 1여 자녀와 손자들 그리고 그를 기리는 많은 주민이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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