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곡] 모두가 예쁜 꽃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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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곡] 모두가 예쁜 꽃들에게
  • 선산곡
  • 승인 2011.03.17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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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눈에 부시다. 봄의 전령은 이 산하를 언제 지나갔을까. 잊고 있었던 듯, 들녘에 펼쳐진 햇살을 보기위해 창문을 연다. 탱자나무 울타리 건너 논둑길에, 긴 신 신은 농부 하나 삽 메고 지나간다. 주변에 깔린 나른한 정적이 부서진다. 부서진 정적에 밀려 먼 지평에 아지랑이가 춤을 춘다.

 

문득 서럽다. 어머니 무덤 위에 쌓인 눈도 녹았을까, 혼자서 부대끼는 감미로운 슬픔으로 봄은 어느새 조용히 왔는가보다. 그 애잔한 환희는 기쁨이면서도 또한 서러운, 묘하게 어긋나는 감회다.

내 기억의 처음, 가장 먼 옛날은 봄이었다. 어머니는 어디 가셨을까, 들녘을 헤매다 지쳐 울먹이며 바라본 산 그림자가 안개인 듯 희미했다. 푸른 보리밭 이랑사이로 노란 장다리꽃이 피어 있었다.

“아가.”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하얀 길 위에 어머니가 나를 부르고 계셨다. 반가움이 넘쳤지만 이미 나는 삐져 있었다. 이리 오라는 손짓에도 그 자리에 서서 울고 있는 나를 어머니가 다가와 끌어안았다.

“내 강아지.”

다독이는 어머니의 손길에 비로소 나는 울음을 씻고 웃었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 어머니의 치마폭을 휘어감아 얼굴을 묻었다. 달콤한 어머니의 냄새가 현기증을 일게 했다. 그 때가 언제였을까. 그 봄이 언제였을까. 해마다 이른 봄이면 내 유년의 기억은 언제나 이렇게 달콤한 서러움을 불러온다.

포플러 나무들이 흰 뼈를 드러내놓고 정연하게 서있다. 그 빈 나뭇가지에 두어 마리 앉아있는 새. 가슴 하얀 것을 보니 까마귀가 아닌 까치가 분명하다. 반가운 소식이라도 물어오려는 것일까. 길 떠나 새로 머문 한적한 산촌의 나날이 언제나 무료했지만 늘 그렇듯 반가운 소식은 올 것 같지 않다. 이 정적의 한복판을 휘젓는 주변의 손길은 어디 있을까.

새들이 날아간다. 그 뒤를 따라가던 눈길이 지평에 닿는다. 넓은 들녘에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데, 산자락 대밭마을에 솟는 흰 연기만 한가하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보리밭 푸른 띠 하나 찾아볼 수 없다. 새싹부터 이삭 때까지 일렁이고 누벼대는 바람결. 보리밭에서는 바람이 눈에 보인다. 보리농사조차 대부분 포기해 버린 이 농촌에 그 바람결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는 기대는 사치가 돼버린 지 이미 오래다.

그러나 그 들녘에 봄은 와 있다. 저 풍경에 얻은 마음의 위안은 생명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바라볼 줄 아는 마음을 길러라.”

누구에겐가 했던 말이었지만 진실은 그와 다르다.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지 않은 것의 차이를 내가 알 수 있었던가. 아름다운 것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서부터 찾아야한다고 나는 감히 말하지 못한다. 마음 속 이기심과 시기, 질투에 뒤범벅이 된 스스로가 언제나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 뒤범벅이 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지금 이렇게 혼자임을 즐기고 있다. 모두를 떠난 척 하면서도 그 모두의 안에서 흔들려 있는 부끄러운 내 모습, 그게 요즈음의 내 모습이었고, 그 모습 보려고 봄은 지금 이렇게 조용히 오고 있다.

 

선산곡 향우는 전북 순창출신으로 한국문인협회 회원, 회문 동인,전북수필문학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수필집으로는 LA쑥대머리,끽주만필,속아도 꿈 속여도 꿈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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