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인물(4) 추산 김일두, 독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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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인물(4) 추산 김일두, 독립군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19.03.14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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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인물열전 네 번째 인물은 추산(秋山) 김일두(金一斗)이다. 17세부터 65세까지 한 평생을 의병전쟁과 독립운동, 남북통일을 위해 몸부림 친 인물이다.

 

17세부터 시작한 항일투쟁

김일두(金一斗, 1891∼1955)는 1891년 순창군 동계면 추동마을에서 김해김씨 김봉진의 장남으로 태어나 1955년 전주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본관은 김해. 자는 동수(東秀)이며, 호는 추산(秋山)이다. 항일운동 때 진동 또는 동 등의 가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어려서 경서에 통달하였고 듬직한 체구와 늠름한 기상으로 많은 기대를 받았다.
1907년 6월 일어난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일제는 고종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정미조약으로 우리나라 통치권의 대부분을 빼앗고, 군대마저 해산시킨다. 일제에 의해 눈물을 머금고 해산한 군인들은 자기가 소지한 무기를 가지고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정미의병은 일본군이 조선의 지형에 어두운 점을 이용하여,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펼쳤다. 정미의병의 본격적인 확산은 강원도 원주 진위대의 봉기로 시작된다.
이때 17세의 김일두는 강원도 원주 진위대장 민긍호(閔肯鎬)의 휘하에 들어가 소대장으로 의병운동을 전개하면서 강원도ㆍ충청북도ㆍ경상북도에서 일본군과 싸워 큰 공을 세웠다. 그러다 충주 결전에서 민긍호 의병대장이 전사하자, 이재후 의병과 함께 1년 간 의병부대를 이끌며 항일전을 진두지휘했다.

항일무장투쟁에 평생 바친 진정한 독립군

1910년,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자 김일두는 일제에 싸우기 위해 반항회를 조직했다. 그 후 전 재산을 정리하여 영국인이 경영하는 태화상회(泰華商會)에서 4백여 개의 폭탄을 구입하여 동지들에게 나눠주며 전국의 경찰서를 일시에 폭파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일제 경찰들에게 발각돼 실패하고 결국은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대종교에 입교하여 대종교 시교원, 참교를 역임하면서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조종국, 최전구, 백정기 등과 대한유생독립단(大韓儒生獨立團)을 조직하여 단장으로 추대되고 항일 투쟁에서 크게 전공을 세웠다.
그 뒤 서울(당시의 경성)에 잠입해 조종국, 곽한일 등과 독립의군부를 조직하고 지하운동을 벌이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돼 또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북경에서 영위대학 의학부에 재학 중 이시영, 신채호, 조성환 등과 결의하고 독립군에 가담하여 군자금 조달과 조직책을 맡았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노령 신위촌의 고평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독립군 중장으로 추천돼 수십 차례에 걸친 일제와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다 1919년 3.1만세 운동이 벌어지고 상해 등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에서 병법을 강의했다.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통신 책임자로 김진동이란 가명으로 김환과 더불어 국내에 밀파되어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이듬해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3년을 복역하는 동안 일본총독의 순시를 계기로 옥중투쟁을 벌여 심한 고문을 받고 5년의 옥고를 치른 후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26년 김동이란 가명으로 재차 국내로 잠입하여 김제에서 다시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다가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사를 치렀다.
주권을 뺏긴 식민지 조국의 삼천리 강산 어디인들 감옥이 아닌 곳이 없었겠지만 독립운동가들이 감옥에서 당한 고문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끔찍했다. 일제가 독립운동가들의 저항 의지를 꺾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감옥 짓기'와 고문이었다. 전기고문, 물고문(고춧가루 섞은 물을 수감자의 코에 들이붓기), 꼬챙이로 손톱 밑을 후비는 고문, 온몸을 화롯불에 달궈진 쇠 젓가락으로 지지는 고문, 대못을 박은 상자에 가두고 이리저리 흔드는 ‘궤짝 고문’ 등 온갖 잔인한 고문을 자행했다.
김일두는 출옥 후 전주 효자동에서 셋방살이를 하였는데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극심하게 고생하였다.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지속하다 발각돼 구류 등 미결 재판에 몇 번 넘겨지는 등 일생의 대부분을 모진 옥고를 치르며 가시밭길을 걸었다.

해방 후, 통일정부 수립에 힘 써

출옥 후 태평양전쟁으로 일제의 탄압이 절정에 달하자 지리산으로 피했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에는 3.1동지회를 조직, 백범 김구와 함께 건국에 힘쓰는 한편 남북통일정부 수립에 전력투구했다.
그러나 백범이 불의의 총탄으로 서거한 후 고향에 내려온 김일두는 옥살이 때의 고문의 여독과 백범을 잃은 슬픔, 분단된 조국의 상황을 개탄하다가 1955년 4월 14일 6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로를 높이 찬양하여 독립유공자로 표창하였다. 1977년에 대통령표창, 1980년에는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 548에 안장돼 있다.

전주 덕진공원ㆍ옛 동계중학교에 추모비

전주 덕진공원 연못을 따라 돌아가는 오솔길을 걷다 보면 김일두의 기적비를 만날 수 있다. 이 비석 위아래 새겨진 문양은 용이나 거북이의 모습이 아니라 무궁화가 새겨져 있다. 나라의 꽃인 무궁화를 비석에 새겨 놓은 것은 김일두가 일제에 저항한 독립운동가였기 때문이다. 이 비는 의사 김일두 선생 기적비 건립추진위원회에 의해 1979년 9월에 건립되었다. 그가 오랫동안 거주하고 생을 마감한 전주시의 덕진공원에 김일두의 비석을 세워, 덕진공원을 휴식공간 뿐만 아니라 역사적 공간으로 활용하려는 전주시의 배려를 확인할 수 있다. 얼마 전까지 구 동계중학교에 초라하게 방치되었던 추모비는 지난해 동계면 비석거리로 옮겨졌다.
우리가 기려야 할 자랑스러운 역사적 인물의 기념관 건립에 대해 행정기관은 예산이 없다는 말로 상황을 종결짓고 만다. 그런데 예산이 없는 것이 아니라, 관심이 없어 예산을 세우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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