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인물(5) 김세종 명창, 동편제의 또 다른 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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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인물(5) 김세종 명창, 동편제의 또 다른 맥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19.03.27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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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면 가작리 김세종 명창 생가 터. <순창군청 사진>

 

김세종(金世宗, 1825-1898)은 조선 후기 헌종ㆍ철종ㆍ고종 3대에 걸쳐 활약한 이른바 ‘후기 8명창 시대’의 한 사람으로, 순창이 낳은 판소리 동편제의 대명창이다. 김세종이 활약했던 19세기 후반의 후기 8명창 시대는 이론과 실제 면에서 판소리의 완성을 보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김세종은 중추적인 역할을 통해 판소리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김세종의 생애

순창군청 누리집에서는 그의 출생지를 동계면 가작리로 지정하고 있다. 그런데 또 다른 조사에 의하면 김세종은 구림면 구곡리 동정자마을이 출생지인데, 순창읍 복실리로 이사해서 살았다는 얘기도 있다. 또 서울에서 판소리 활동을 할 때 예쁜 기생 하나를 소실로 두고 예순 살이 넘어 고향으로 내려올 때 소실도 함께 데리고 와 팔덕면 월곡리에 집을 얻어 살았다고도 한다. 김세종에게는 본처와의 사이에 김공진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은 경상남도 산청군으로 이사하여 살았고 그 후손들은 일본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동편제의 또 다른 맥을 형성하다

그러면 김세종은 어떤 소리를 이었을까? 김세종이 어려서 소리를 배우러, 전기 8명창 중의 한 사람이자 판소리 가왕(歌王)으로 꼽히는 송흥록에게 찾아갔다. 그랬더니 송흥록이 “네 집안 소리도 좋은데 무엇하러 배우러 왔느냐”고 하면서 되돌려 보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렇다면 김세종은 송흥록의 소리가 아니라, 바로 자기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온 소리를 그대로 익혔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김세종은 남원에 전승되는 송흥록 가문의 소리와는 계열이 다른 동편제의 또 다른 맥을 형성하게 된다.

신재효와의 만남

김세종은 신재효와의 관계로 유명하다. 신재효는 소리꾼은 아니었지만 판소리 사설을 정리하고 판소리 창자 교육 및 후원에 힘 쓴 판소리 활동가였다. 만석꾼인 신재효는 자신의 집에 소리청을 만들어 수많은 소리꾼을 후원하고 길러냈다. 이때 이들에게 소리를 가르치는 스승으로 동편제의 명창 김세종을 초빙했다.
신재효가 길러냈다고 하는 최초의 여류 명창 진채선도 김세종이 소리를 가르쳤다. 신재효는 경복궁 경회루 낙성연을 축하하기 위해 진채선을 서울로 올려 보냈는데, 이때 서울로 진채선을 데리고 가서 대원군에게 소개한 사람도 역시 김세종이었다. 김세종은 신재효의 지도로 이론 공부를 하였다. 그래서 창극에 대한 이론과 비평은 자타가 공인하는 당대의 독보적 존재였다. 판소리의 이론 확립에 기여한 연창자로 이른바 실기와 이론을 겸비한 명창인 셈이다.
정노식의 《조선창극사》를 통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그의 판소리이론 중 대표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판소리 발림을 극적인 내용과 같게 해야 하며, 얼굴 표정과 몸의 모든 동작이 극적인 내용 및 음악과 맞아야 한다. 둘째, 음악은 사설의 극적인 내용과 융합되어야 한다. 셋째, 한가한 장면에서는 느린 장단을 쓰고, 긴박한 장면에는 빠른 장단을 쓰며, 슬픈 장면에는 계면조를 쓰고, 웅장한 장면에는 우조를 써서 조와 장단이 판소리 사설의 극적인 내용과 융합되어 구성되어야 한다. 넷째, 어단성장(語短聲長)이라 하여 가사는 짧게 붙이고, 소리는 길게 부른다. 어단성장이란 말은 부르기 좋고 듣기 좋게 하자는 데에서 나온 말로 예를 들어 ‘적성의 아침 날은’이라고 부를 때 ‘적성’은 짧게, ‘의’는 길게 하여 명사나 한문어귀는 짧게 부르고 ‘에’, ‘으로’, ‘의’ 등의 조사는 길게 부르라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판소리이론은 오늘날 판소리의 일반적인 이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김세종 명창 생가 터 우물. <순창군청 사진>

 

인물 좋고 인기 많은 소리꾼

김세종은 인물이 잘 생겼었는데, 특히 수염이 배꼽까지 닿을 정도로 길었다고 한다. 김세종은 학식도 풍부했고, 늘 도복 차림으로 다녔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도복 영감’으로 불렀다고 한다. 신분은 천민이지만 그야말로 인물 좋고 풍채 좋은 소리꾼이었던 모양이다.
김세종이 당시에 어느 정도의 대접을 받았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자료가 있다. 1885년 고종 22년 9월 전라감영에서 잔치를 하고 돈 쓴 내력을 기록한 <연수전하기>라는 문서가 있는데, 거기에 보면 소리꾼 이날치, 장재백과 함께 김세종이 등장한다. 장재백은 김세종의 제자이고, 이날치는 서편제 판소리의 시조인 박유전(순창 복흥 출신)의 제자로 역시 대단한 명창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그런데 이날치는 장재백과 함께 50냥을 받았고, 김세종은 100냥을 받았다. 장재백은 제자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동년배인 이날치보다 배를 받은 것을 보면 김세종의 평가가 어떠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김세종판 춘향가, ‘보성소리’ 확립에 기여하다

김세종의 문하에서는 그와 더불어 후기 8명창으로 꼽히는 장재백과 김찬업, 이들보다 한 세대 뒤로 근세 5명창이 되었던 이동백 명창 등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의 소리는 더 이상 동편제 지역에서 전승세력을 확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소리는 서편제 지역인 전남 보성으로 넘어가 ‘보성소리’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지금도 보성소리꾼들에 의해 ‘김세종판(版)’이란 이름으로 굳건하게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보성소리’는 서편제가 동편제를 받아들이면서, 즉 동ㆍ서편제가 접목되어 색다른 양식의 소리로 거듭난 것이다. 판소리학계에서는 보성소리의 탄생 시점을 박유전(순창 복흥 출신)-정재근을 거쳐 서편제 소리를 이어받은 정응민이 전북 부안에서 동편제 소리꾼인 김세종의 제자 김찬업으로부터 ‘김세종판 춘향가’를 배운 때로 본다.
이후 ‘보성소리’는 정응민의 문하에서 조상현, 성우향, 성창순 등이 배출되면서 오늘날 판소리계를 떠받치고 있는 가장 큰 유파로 성장하게 되었다. 서편제의 한 유파라 할 이들 보성소리꾼들이 지금도 즐겨 부르는 것이 바로 동편제인 ‘김세종판 춘향가’인 것이다.

김세종의 판소리사적 위치

김세종은 송흥록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소리가 갖는 정통성을 재확인하고 자신의 집안 소리를 이어받았다. 또한 신재효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소리가 이론적인 체계를 가질 수 있도록 다듬었다. 그리고 대가(大家)의 위치에서 제자인 김찬업ㆍ이동백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확립한 판소리를 후세에 전하는 하나의 모범을 이루었다.
현재 연행되고 있는 판소리 <춘향가>의 대부분은 김세종의 판소리 영향권에 속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소리를 근간으로 하고 있는 보성소리는 물론이고 동편제의 소리 또한 그의 영향을 받고, 체계화를 도모하였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김세종은 판소리의 이론화와 이를 통한 교육체계의 확립을 통하여 우리 판소리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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