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인물(7) 장재백 명창, 남원판소리 중흥에 기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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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인물(7) 장재백 명창, 남원판소리 중흥에 기여한
  • 림재호 편집위원
  • 승인 2019.04.24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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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성면 운림리 매미터 출신 장재백(張在伯, 1849-1906) 명창 생가터. <순창군청 사진>

장재백(張在伯, 1849-1906) 명창은 적성면 운림리 매미터 출신이다. 조선후기 8명창 중 한 사람으로 동편제의 법통을 이어받은 판소리 명창이다.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에서는 그의 이름을 장자백으로 소개했으나, 최근 학계에 보고된 것을 보면 본명은 장재백이다. 기록에 의하면 장재백은 남원군 주생면 내동리에서 살다가 1907년 사망하여 그곳에 묻혀, 현재 그 묘지가 남아 있다.
장재백은 철종과 고종 양대 간 인물로, 동계면 출신의 명창 김세종(金世宗)의 직계 명창이다. 청미하고 풍부한 성음과 뛰어난 기예로 <변강쇠 타령>, <춘향가> 등을 적성면 매미터에서 득음하였다. 따라서 장재백의 판소리는 순창을 중심으로 다듬어지고 완성도를 높여 나갔으며, 매미터는 장재백의 소리 득음지가 되었다.

 

풍모 뛰어난 미남자

장재백이 판소리 명창이 된 동기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장재백은 풍모가 뛰어난 미남자로 유명했으며, 아내 또한 미인이었다고 한다. 평소 장재백의 소리 실력이 다른 명창들에게 뒤지는 것을 불만스러워했던 그의 처는, 아무리 생각해도 남편이 명창으로 대성하기는 틀렸다고 생각하고 몰래 집을 나가 전라북도 옥구의 어느 부잣집 첩이 되고 말았다. 아내에게 배신당한 장재백은 충격을 받아 자살하려고까지 했으나, 비장한 각오로 학습에 정진해 마침내 자타가 공인하는 명창의 반열에 올라선다.
장재백이 명창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자 여기저기 다니면서 소리를 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전북 옥구의 회갑연에 초청을 받아 가게 되었다. 장재백이 온다는 소문을 들은 전처는 몰래 잔치에 참여해 장재백의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인물 좋은 장재백이 소리마저 잘하게 되자 다시 솟아나는 연모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 소리를 끝내고 돌아가는 장재백의 소매를 붙잡고 다시 인연을 맺자고 사정했다. 그러나 장재백은 끝내 이를 거절하고 돌아섰다고 한다.

소리꾼 신분 해방에 기여한 소리꾼

장재백은 8도 명창대회에 전라도 대표로 참가해 어전에서 소리를 하게 되었는데, 고종과 중전민씨가 “네가 최고의 명창”이라며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라고 물었다.
이때 장재백은 “우리 쟁인들은 죽어서도 봉분을 짓지 못하므로 이를 시정하도록 전국에 명을 내려 주옵소서” 하여 그날부터 봉분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장재백이 소리꾼들의 신분을 천민에서 평민으로 해방시키는 중대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에 용기를 얻은 많은 소리꾼들이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장자백은 1887년(고종 24) 무과에 급제해 교지를 받았다. 소리꾼이 받은 교지로는 전라북도에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이라 한다. 이 교지에는 장재백의 이름이 '장기성(張基成)'으로 되어 있는데, 이 이름은 족보에 나오는 이름이다. 동시대의 다른 명창들과 달리 그는 한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소리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장재백은 말년까지 무대에 서는 열정을 보여 주기도 했다. 1902년에 원각사(圓覺社)에서 고종 어극 40주년 경축 행사에 김창환ㆍ송만갑ㆍ이동백ㆍ강용환ㆍ김채만ㆍ염덕준ㆍ송옥봉ㆍ유성준ㆍ한경석ㆍ허금파ㆍ강소향 등 당대 쟁쟁한 명창들과 합동 공연을 하기도 했다

판소리에 정악 가곡성 우조 도입

장재백은 김세종의 소리를 계승하여 <춘향가>와 <변강쇠타령>을 잘했으며, 그의 더늠으로는 <춘향가> 중 ‘추천목’으로 하는 소리가 장기라고 전한다. ‘추천목’은 <춘향가> 그네 뛰는 대목 중 "광풍에 놀랜 원앙이 입도 젖도 물어보고 우선 호우로 노는 양"을 하는 대목을 부르는 소리로 그의 이런 특장은 유성준으로 이어졌다. 이 대목은 우조(羽調) 중에서도 정악의 가곡성을 닮은 가곡성 우조라는 독특한 창법으로 되어 있다. 가곡성 우조는 정악의 음악적 특성을 판소리에 도입한 통로로 개발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 만큼 가곡성 우조로 부르는 대목의 더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장재백이 민속악이었던 판소리에 정악의 음악적 자산을 도입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는 증표가 된다. 한학에 조예가 깊어 지식을 겸비한 소리꾼 장재백이 판소리에 가곡성을 새롭게 이입한 것은 자신의 예술세계를 더욱 확장하고 발전시킨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남원판소리 중흥에 기여한 순창사람

장재백은 남원판소리 역사에서 대단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이다. 남원판소리는 가왕 송흥록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그의 동생 송광록이 구례로 이사하여 남원의 판소리는 맥이 끊어질 위기에 처한다. 이때 남원판소리의 맥을 이은 사람이 바로 장재백과 그의 가문이다.
장재백의 주요 혈연관계를 보면 그 가계가 국악 명가임을 알 수 있다. 장재백의 누이 장주이는 동편제의 거장이었던 유성준의 처이다. 유성준은 송만갑의 아버지 송우룡의 제자로 <수궁가>와 <적벽가>를 잘 불러서 후대에 전한 사람이다. 유성준의 제자로는 임방울ㆍ김연수ㆍ정광수ㆍ박동진 등이 있다. 유성준의 동생 유준은 김정문의 어머니이며, 김정문의 처 장봉선은 장재백의 막내 동생인 장봉순의 손녀이다.
김정문 명창은 유성준의 여동생 아들이자 송만갑의 제자로 남원 판소리를 대표하던 사람이다. 강도근ㆍ박록주ㆍ박초월이 그의 제자이다. 장봉선의 언니 장봉임은 전라북도 무형문화재였던 성운선의 어머니이다.(성운선은 장재백의 외종증손녀)
장재백의 조카(동생의 아들)인 장득진(張得眞, 1884-1928)은 일제시대 ‘우리 국악계의 이미자(李美子)’로 통했던 이화중선의 남편으로, 적성면에서 이화중선을 국창으로 길러낸 소리선생이다. 이화중선이 장득진의 첩으로 들어가 그에게 소리를 익혔다는 전언에 비춰 보면, 이화중선이 학습한 소리가 장재백으로부터 이어진 장씨 집안의 소리였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이화중선이 유성기 음반으로 남긴 춘향가 녹음의 사설 및 장단 구성은 현전하는 〈장자백 창본 춘향가〉의 그것과 상당히 유사하다.
또 1970년대까지 전주에서 활동하면서, 전주를 대표하던 소리꾼 중의 한 명이자 명무(名舞)였던 장녹운(張綠雲)이 그의 증손녀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보면 장재백의 가계가 남원과 순창 일원의 판소리 명창들과 혈연으로 이어지면서, 이 지역 판소리를 면면히 잇는데 크게 기여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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