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분다(5)/ 무제
상태바
바람이분다(5)/ 무제
  • 선산곡
  • 승인 2019.06.04 14: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무제(無題)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에게 기자가 물었다.
“13일에 금요일이 겹치면 나쁜 일이 생긴다는 말을 믿습니까?”
“믿습니다.”
속설을 믿는 이유를 기자가 되물었다.
“만약 믿지 않는다면 13일에 금요일은 좋은 일만 생기는 날이 되겠군요.“

 

좋은 일 나쁜 일이 날짜와 요일에 따라 생기는 법은 당연히 없겠지만 우리 주변에 나이마디 아홉수를 특별히 생각하는 사람은 많다. 궂은일 뒤엔 저항할 수 없는 운명으로 돌리기도 하지만 그러기 전 나쁜 일이 생길 수도 있음을 경계하라는 뜻도 있다. 그래서 칠순(七旬), 팔순(八旬), 간신히 넘긴 아홉 고비의 수(壽)를 안도(安堵)하자는 뜻이 생겼을 법하다.
아들들이 ‘상을 괴어’ 차림을 해드릴까요? 했다는 동갑내기 친구의 말을 듣고 실소를 했다. 울긋불긋 색으로 물들인 과자와 유과 과일 생선을 높이 올려 괸 상을 앞에 두고 한복을 입은 내외가 앉고 그 앞에서 자식들은 절을 한다. 생각해보면 전통의 의례는 의식을 위한 고임이 분명하건만 어쩐지 퇴색한 컬러사진 속의 풍속도 같아 보인다. 컬러사진은 근래의 이미지를 담고 있지만 묘하게도 흑백보다 빛바램의 이미지가 강하다. 흑백은 명암을 그대로 지니고 있을 뿐 빛이 바래지는 않는다. 한때 컬러로 찍어놓은 잔칫집 풍경이 더 퇴색한 삶으로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이었을까, 괸 상을 앞에 놓고 앉아있는 ‘총천연색의 현실’은 허무하다는 생각이 드는, 묘한 이율배반이다. 순(旬)이 열흘이며 열 번이라는 셈은 잠시일 뿐이다. 순환이 아닌 흐름에 적응하는 것이 인생이다. 분명한 것은 오르막길이 아닌 내리막길이며 그 길이 눈앞에 엄연하다는 것이다. 친구는 장성한 아들들의 효도를 자랑스레 말했지만 나는 주인공이 되는 장면을 상상도 해보지 않아 웃음이 나왔던 것이다.
밤늦어 찻집을 나오는데 꽃향기가 코를 스친다. 찻집 주차장 울타리 아카시나무에 하얀 꽃무리가 불빛에 비친다. 해마다 이 시절이 되면 느끼는 감회의 몫이 지금이 아닌 지난날에 더 기울어진다. 나무뿌리의 뿌리혹박테리아가 땅을 비옥하게 하고 꽃은 꿀을 주어 개발도상국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수목 아카시. 우리나라에서 흔히 아카시아로 부르지만 그 나무의 정식 이름은 아카시다. 아카시아라는 나무는 따로 있다. 열대성 수목으로 꽃은 노란색으로 피는, 호주 아프리카가 원산인 품종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나지 않는다.
초등학생 시절, 낯선 고장으로 전학을 갔다. 적응이 더뎌 하학 길 밭두렁 길을 혼자 걸으며 날마다 나는 울었다. 고향생각 때문이라면 철없다 했을까. 동요 <고향 땅>을 부르면서였다. 꽃이 진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고향땅에 핀 아카시의 의미는 내 울음의 원천이었다. 그 동요 뒷부분 ‘아카시아 꽃잎이 바람에 날리니’의 소절이 있다. C장조 키, 이 동요는 기타반주를 하면 끝마디 ‘니’의 반주가 G7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마디 G7을 항상 E7로 쳤다. G7과 E7의 차이는 분명 있지만 장조인 이 동요가 이 E7 키 하나로 비장해져버리는 것은 나만의 느낌 때문이었다. 이젠 손이 무뎌 기타도 칠 수 없게 된지 오래지만 이 계절, 아카시가 아카시아로 굳어진 동요가 때 아니게 지난날 추억을 자극해온다. 아홉수는 지났다. 누구는 괸 상 앞에 놓고 맞을지 모르는 날을 나는 가족들과 함께 커피숍 커피 한잔으로 때웠다. 다만 아카시꽃 향기를 감추는 이 밤의 어둔 장막이 갑자기 서글퍼지는 이유는 꼭 지나버린 세월 탓만은 아니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금과초등학교 100주년 기념식 4월 21일 개최
  • [순창 농부]농사짓고 요리하는 이경아 농부
  • 우영자-피터 오-풍산초 학생들 이색 미술 수업
  • “이러다 실내수영장 예약 운영 될라”
  • [열린순창 보도 후]'6시 내고향', '아침마당' 출연
  • 재경순창군향우회 총무단 정기총회